유일한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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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 49-6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서울 동작구 대방동 49-6 유한양행 빌딩
유한양행 빌딩
유한양행 빌딩 1층에는 애국지사 유일한 박사 기념관이 있다.
柳一韓記念館(유일한기념관)
유일한 박사의 생애와 인생철학
■ 우리나라가 국권을 상실하고 일제의 지배하에 처했던 시절에 자본주의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성장하면서 자본주의의 참정신을 배웠고, 외국땅에서 독립운동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던 서재필 박사를 비롯한 여러 선배 동지들과 접하면서 나라 사랑의 뜻을 키웠으며 귀국후 고국에서의 기업활동에서도 항상 자본주의의 참뜻을 실천에 옮겼던 문자 그대로 신상(神商)으로 존경받는 애국적 민족기업인이었다.
■ 유일한 박사는 무엇보다도 근면, 성실, 정직해야 한다는 신조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사생활까지도 검약을 몸소 실천하였으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낭비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생활이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가족에 대해서도 사치스러운 생활은 허용하지 않았다.
■ 유일한 박사는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크리스챤으로 시작했다. 유일한은 어린 나이로 조국을 떠나 미국에 갈 때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후와 사랑에 맡기는 것을 보고 체험했다. 또한 교회에서 처음 유일한의 손을 붙들어준 사람도 침례교회 목사였고, 독실한 신앙심을 가졌던 두 자매는 언제나 유일한을 신앙적으로 이끌어 주었고 계속 기도로 도왔다. 유일한 박사의 삶도 그의 전 생애를 통해 기독교적 정신과 신앙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후일 유일한 박사의 기업정신을 논평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를 "청지기"의 정신을 실현한 사람이라고 평한다. 청지기는 소유주가 아니다. 일과 재산을 맡아서 관리할 뿐이며 누구보다도 충성스러이 노력해야 하는 일꾼이다. 맡아서 관리하는 것이 청지기의 본분이다. 유일한 박사는 바로 그런 정신으로 일관했다. 유일한 박사는 기업체의 주인은 사회이고 기업가는 그들의 재산을 맡아 관리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미래지향적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일한 박사를 아는 사람들 에게는 그것이 진리이며 인생의 궁극적인 지표가 되어야함을 쉬 깨닫게 된다.
애국사상과 독립운동
민족기업가 유일한 박사의 평생은 기업활동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재미 활동기에는 30년간을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광복을 위해 애썼던 고귀하고 애국적인 보람의 일생이었다고 평가된다. 유일한 박사는 1904년 9살의 나이로 미국에 건너가 네브라스카주 커니, 헤스팅스에서 중.고등학교를 수학하는 한편, 1909년 6월 독립군 양성을 위하여 재미독립운동가 박용만이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에서 3년동안 군사훈련을 받으면서 고국의 광복을 위한 집념을 불태웠다.
유일한이 미시간대학에 진학하여 공부하고 있을 때, 국내에선 3.1운동을 맞게 되었다. 유일한은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한인 자유대회에 이승만, 서재필, 정한경, 민찬호, 윤병구, 조병옥, 임병직, 장기영 등과 같이 참여하여 「한국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하는 결의문」을 작성하여 직접 낭독하였다.
유일한 박사는 1926년에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창설하고 민족기업을 육성하다가 1938년 12년만에 재차 도미하게 되었다.
그는 미주의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LA, 워싱턴, 뉴욕 등을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LA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 집행부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 「대한국민회」하와이 지방총회 간부들과 「국민군단」간부들의 기념촬영. 둘째줄 중앙의 흰 양복을 입은 이가 「국민군단」단장인 박용만 선생
또한 유일한 박사는 LA시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현기식에 참여하여 조소앙 임정외무부장, 이승만 한족연합회 회장, 캘리포니아 주지사등의 축사를 낭독하는 용기와 지혜를 보여주었다.
■ 재미한인 경위대, 즉 「맹호군」의 관병식
1943년에는 해외한족연합회의 기혹 연구원장으로 「한국과 태평양전쟁」이라는 책자를 발간,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바 있다. 특히 그는 「NAPKO작전」의 제1조 조장으로 국내 침투작전에 임하여 매일 고된 강훈련을 받아 유사시에 대비하였다. 그의 임무는 직접 국내정진군을 이끌고 본토에 고공으로 낙하하거나 바다로 침투하려는 적후공작(敵後工作)이었다. 중경 임정의 OSS작전과 양면전을 전개하려 했었으나 8.15광복으로 인해 불발, 좌절되고 말았다.
유일한 박사는 경제적인 민족주의의 운동을 기업활동이나 잡지, 강연등을 통해 내외에 크게 선양한 바있다. 그의 76년 생애중 30여년이 독립운동의 기간이었다. 그중에는 기업활동도 있었으나 그것 역사 독립운동의 한 형태였음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유일한 맹호군 창설주역, 유한양행 설립자

■ 1942년 8월 29일 미국 LA시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현기식에서 축사를 대독하는 유일한 박사(TV촬영)
기념관에는 많은 훈장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건국훈장 독립장
고 유일한
1995.8.15
조국의 자주독립과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공으로 광복 50주년을 맞아 광복절에 대통령으로부터 수여받음.
1층 홀에는 유일한 박사의 흉상이 있었다.

유일한은 서울 사람이다. 평남 평양(平壤)에서 출생하여 박용만(朴容萬)의 숙부 박장현(朴章鉉)이 평안도 선천(宣川)에 설립한 사립학교에서 박용만으로부터 국어·일어·산술·중국고전 등을 배웠으며, 1905년 2월 박장현과 박용만이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미국행을 결심하자, 이들의 제자였던 정순만(鄭淳萬)의 아들 정양필(鄭良弼)·이종철(李鍾澈)·정한경(鄭翰景)·유은상(柳殷相)·이희경(李熙景)·이종희(李鍾熙) 등 후일의 한인소년병학교 동반자들과 함께 도미길에 올랐다. 도미 후 1906년경 박장현·정한경·정양필 등과 함께 미주 중서부지역인 네브라스카주 커니시에 이주한 그는 1909년 6월 박용만이 헤이스팅스에 설립한 미국내 최초의 한국독립군 사관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에 입교하여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받는 한편, 1911년 헤이스팅스중학교에 입학하여 3년 만에 졸업하였다. 1916년 미시건주립대학 상과에 입학한 그는 졸업반이던 1919년 4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中央總會)에서 독립운동 후원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선전을 목적으로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자유대회(韓人自由大會)를 개최하게 되자, 재미한국인 대표로 선출되어 동 대회에 참가하였다. 동 대회에서 기초작성의원회(起草作成議員會) 대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한국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釋明)하는 결의문」을 작성·낭독하여 한국의 독립을 세계 열강에 호소하였다. 1919년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 세계적인 전기회사(電氣會社)인 제너럴 일렉트릭사의 회계사로 근무하면서 1920년 한국친구회(The 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 보스톤지부 비서로 활동하면서 한국친구회(韓國親舊會)에 운영자금을 기부하고,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친구회의 가입을 권유하는 등 동회의 활동을 적극 후원하였다. 그 후 1922년 대학동창생인 스미스와 함께 숙주나물 통조림을 생산하는 라초이(La Choy) 식품회사를 설립하여 크게 성공하자, 1924년 국제무역회사인 유한주식회사(柳韓株式會社)를 설립하고 사장에 서재필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5년 숙주나물의 원료인 녹두 구매차 중국 상해를 거쳐 북간도지역을 순회하며 21년만에 헤어진 가족과 상봉하기도 하였다. 1925년 세브란스의전(醫專) 에비슨 학장으로부터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초청을 받은 그는 회사를 정리하고 1926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12월 서울 종로에서 유한양행(柳韓洋行)을 창립하고 초대 사장에 취임하여 의약품·위생·화장품·농기구·염료 등 사업을 다각화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1928년 동아일보 지상에 최초의 염료 광고, 최초의 약품광고를 게재하여 큰 수익을 올리는 사업 수단을 발휘하는 한편, 보스톤에서 『한국에서의 소년시절(When I was a boy in Korea)』이란 책자를 출간하여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실상을 간접적으로 홍보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 후 세계 각국과 교역을 하며 회사를 성장시킨 그는 귀국한 지 12년 되던 해인 1938년 4월 재차 도미하여 사업 활성에 전력하는 한편, 1941년 남가주대학(USC)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를 취득하기도 하였다. 1939년 중국에서 한인독립운동단체인 광복진선(光復陣線)과 민족전선(民族戰線)이 하나로 통합되고 중·일(中日)간의 전쟁이 고조되던 즈음인 1940년 9월 북미 대한인국민회는,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 대표자들에게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시국대책을 강구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개최한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의 결의에 따라 동년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되다. 미주 로스앤젤레스에 설치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執行部) 위원으로 선임된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추진하였다. 또한 동년 12월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으로 미국 육군사령부의 허가를 얻어 로스앤젤레스에 캘리포니아주 민병대 소속으로 일명 맹호군(猛虎軍)인 한인국방경위대(韓人國防警衛隊)를 편성하는데 적극 후원하였다. 1942년 당시 미육군 전략처(OSS)의 한국담당 고문으로 활약하며 펄벅과 교유하기도 한 그는 동년 8월 로스엔젤레스 시청 앞에서 맹호군 창설과 함께 진행된 현기식(懸旗式)에 참여하여 이승만(李承晩)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趙素昻) 등의 축사를 낭독하는 등 맹호군 창설과 현기식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한편, 동년 10월 미국정부 전략청(戰略廳)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기획연구부(企劃硏究部) 위원장이었던 그에게 전략청의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는 연구서 작성을 권유하자, 1943년 11월 맹호군 사령관 김용성(金容成), 이사 송헌주(宋憲澍) 등과 함께 한국인이 태평양전쟁에 보다 유효하게 참가하기 위한 『한국과 태평양전쟁(Korea & Pacific War)』이란 비망록을 작성·간행하여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홍보하는 동시에 지속적으로 군자금을 출연하여 독립자금을 적극 후원하기도 하였다. 1944년 11월 『아시아와 아메리카(Asia and the America)』란 잡지에 「한국과의 교역을 권한다(Do Business with Korea)」라는 기고문을 게재하여 한국의 사정을 세계에 널리 홍보하였으며, 1945년 1월에는 미국 버지니아주 핫스프링에서 태평양연안 12개국 대표 160명이 참석한 IPR(Institute of Pacific Relation) 회의에 정한경·전경무(田耕武) 등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우리의 독립 당위성을 강조하는 모임을 개최하고 한국의 독립문제를 공론화하는 외교적 성과를 이룩하였다. 또한 곧 이어 동년 1월 미군의 한국침투작전의 일환인 냅코(Napko) 작전계획에 따라 캘리포니아주에 특수공작을 위한 한인훈련부대가 설치되자, 이에 입대하여 제1조 책임자로 선임되어 무기·비무장전투법·지도읽기·파괴·무전·촬영·낙하산훈련·비밀먹 사용법·선전·일본인의 특성 등에 대한 훈련을 받으며 임시정부의 OSS작전과 양면작전을 전개하여 국내에 침투하려고 하였으나, 일본군의 항복으로 인해 국내정진작전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 후 1946년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민족자본 사업으로 육성하는 한편, 육영사업에도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
創業者(창업자)
柳一韓 博士 像(유일한 박사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