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서울특별시 구로구 온수동 45-48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아버지 유기연은 미국 감리교에서 조선인 유학생을 선발한다는 말을 듣고 1905년, 당시 9살에 불과한 큰 아들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다. 큰 돈이 들 수도 있는 유학을 보낸 이유는 자신의 자식들이 식견을 넓혀서 민족을 위해 일하기를 바랐기 때문으로 유기연은 자식들을 러시아, 일본, 중국에 유학을 보내서 공부하게 하였다. 배에서 아버지가 환전해 준 미국돈을 잃어버린 유일한은 인솔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용만의 배려로 미국 네브래스카 주의 독신자 자매인 태프트 자매에게 입양되었다.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독립군을 기르기 위해 만든 헤이팅스 소년병 학교에 1909년에 1기로 입학하였다.
자신의 힘으로 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발전기회사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제너럴 일렉트릭사에 취직한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돈을 모은 그는 1922년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주)를 설립하였다. 새내기 사업가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자, 유일한은 일부러 교통사고를 내서 숙주나물 통조림을 기자들이 소개하도록 하여 미국인 특히 숙주나물을 조리하여 먹는 중국계 미국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덕분에 사업은 번창했고, 중국계 미국인 여성이자 소아과 의사인 호미리와 결혼했다. 1925년에는 서재필과 New Il-han & Co. 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후에 서재필은 유일한이 귀국할 때 유한양행의 버드나무 CI를 제작하여 선물할 정도로 유일한을 아꼈다.
자신의 힘으로 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발전기회사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제너럴 일렉트릭사에 취직한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돈을 모은 그는 1922년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주)를 설립하였다. 새내기 사업가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자, 유일한은 일부러 교통사고를 내서 숙주나물 통조림을 기자들이 소개하도록 하여 미국인 특히 숙주나물을 조리하여 먹는 중국계 미국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덕분에 사업은 번창했고, 중국계 미국인 여성이자 소아과 의사인 호미리와 결혼했다. 1925년에는 서재필과 New Il-han & Co. 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후에 서재필은 유일한이 귀국할 때 유한양행의 버드나무 CI를 제작하여 선물할 정도로 유일한을 아꼈다.
1946년 7월 미국에서 돌아와 유한양행을 재정비하고, 대한상공회의소 초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52년에는 고려공과기술학교, 1964년에는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1969년 경영에서 은퇴하며 전문경영인에게 유한양행의 경영권을 인계하였다.
1971년 별세하기 전, 아들 유일선 변호사의 딸의 학자금으로 쓰일 1만불을 제외한 전 재산을 교육사업에 기부한다는 유서를 남겼다.
1971년 별세하기 전, 아들 유일선 변호사의 딸의 학자금으로 쓰일 1만불을 제외한 전 재산을 교육사업에 기부한다는 유서를 남겼다.
눈으로 남을 볼 줄 아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다. 그러나 귀로는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알고 머리로는 남의 행복에 대하여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더욱 훌륭한 사람이다.
유일한 어록 중에서
유일한 어록 중에서
유한공업고등학교 앞에 있는 유일한 박사의 묘
유일한 박사의 생활철학
"정성껏 좋은 성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게 봉사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인재를 양성하여 사회에 배출하며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첫째. 기업을 키워 보다 많은 일자리를 만들고, 둘째. 성실하게 납세하며, 셋째. 그리고 남은것은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한다" 이 말은 유일한박사의 기업이념이자 생활철학으로서 평생동안 몸소 실천하셨으며 유한의 정신과 신조의 바탕이 되었다.
유한의 "유"는 유박사의 성이며 "한"은 한국을 표시하는 뜻으로서 이 두 글자를 합한 "유한"은 한국과 한민족에 대한 유박사의 깊은 헌신의 정을 상징하는 것이며, 유박사의 조국애의 정열은 마침내 오늘날의 유한양행을 키워 사회의 공기로 만드셨고 인재의 양성을 위하여 유한중.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시고 전 재산으로 재단을 만드시어 장학제로 많은 참된 인재를 배출하게 하시었다.
이처럼 항상 유박사의 숭고한 정신과 불멸의 유업은 손수 이룩하신 유한양행의 기업이념을 통하여 구현되고 유한학원에서 배출되는 성실한 역군들 가슴속에 깊이 심어져 영원히 빛나리라.
"정성껏 좋은 성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게 봉사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인재를 양성하여 사회에 배출하며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첫째. 기업을 키워 보다 많은 일자리를 만들고, 둘째. 성실하게 납세하며, 셋째. 그리고 남은것은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한다" 이 말은 유일한박사의 기업이념이자 생활철학으로서 평생동안 몸소 실천하셨으며 유한의 정신과 신조의 바탕이 되었다.
유한의 "유"는 유박사의 성이며 "한"은 한국을 표시하는 뜻으로서 이 두 글자를 합한 "유한"은 한국과 한민족에 대한 유박사의 깊은 헌신의 정을 상징하는 것이며, 유박사의 조국애의 정열은 마침내 오늘날의 유한양행을 키워 사회의 공기로 만드셨고 인재의 양성을 위하여 유한중.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시고 전 재산으로 재단을 만드시어 장학제로 많은 참된 인재를 배출하게 하시었다.
이처럼 항상 유박사의 숭고한 정신과 불멸의 유업은 손수 이룩하신 유한양행의 기업이념을 통하여 구현되고 유한학원에서 배출되는 성실한 역군들 가슴속에 깊이 심어져 영원히 빛나리라.
柳一韓 博士 墓(유일한 박사 묘)
DR. ILHAN H. NEW
1895. 1. 15 - 1971. 3. 11
DR. ILHAN H. NEW
1895. 1. 15 - 1971. 3. 11
유일한 박사의 따님이신 유재란 여사의 무덤이다.
1991년 작고하시면서 역시 200억원 되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을 하셔서 고 유일한 박사님의 명예를 이어가셨습니다.
奉仕(봉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주고 간 柳載羅(유재라) 여사의 넋이 여기 누웠느라.
1929.10.19-1991.3.18.
1991년 작고하시면서 역시 200억원 되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을 하셔서 고 유일한 박사님의 명예를 이어가셨습니다.
奉仕(봉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주고 간 柳載羅(유재라) 여사의 넋이 여기 누웠느라.
1929.10.19-1991.3.18.
서울 구로구 항동 1-7 유한공업고등학교. 교문 쪽은 서울이고, 학교 저쪽은 부천시 괴안동 185-34이다.
유일한(柳一韓, 1895년 1월 15일~1971년 3월 11일)은 주식회사 유한양행을 설립한 대한민국의 기업가이자 독립운동가, 교육인으로, 본명은 유일형이며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그는 자신의 유언에서 "자신의 전 재산을 교육하는 데에다가 기증하라"고 하여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손수 실천하신 분이다.
유일한(柳一韓, 1895년 1월 15일~1971년 3월 11일)은 주식회사 유한양행을 설립한 대한민국의 기업가이자 독립운동가, 교육인으로, 본명은 유일형이며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그는 자신의 유언에서 "자신의 전 재산을 교육하는 데에다가 기증하라"고 하여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손수 실천하신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