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광복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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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2가 99-11
탐방로그
부산 서구 동대신동2가 99-11 중앙공원에 왔다. 민주공원 왼쪽은 충혼탑이 있는 중앙공원이고, 오른쪽은 대한해협전승비, 4.19희생자 위령비 등이 있는 민주공원이다. 또한 이곳에는 소해 장건상 선생의 동상과 독립투사 최천택 선생 기념비도 같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 부산항일학생운동(일명 노다이사건)

부산항일학생운동은 1940년 11월 23일 경남학도 전력증강국방경기대회(군사 훈련을 겸한 체육대회)에서 일본학교를 우승시키기 위해 민족차별적 심판을 한데 대한 불만이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11월 21, 22일에 열린 모의 야영전투훈련 기간중 심판장이었던 노다이는 조선인 학생에게 일부러 고된 산지를 우회시키고, 일본인 학생은 평지에서 전투 훈련을 시키는 등 편파적 훈련을 진행하였다. 또한 11월 23일 경남학도 전력 증강경기대회에서는 전년도 1회 우승교인 동래중학을 제치고 일본인 학교인 부산중학교를 제일 먼저 입장시켰으며, 동래중학이 경기에서 1위를 차지하면 트집을 잡아 재시함을 시키거나 반칙이라고 떼를 쓰는 등 악랄한 수법으로 성 적을 부진하게 하였다. 그리고 최종 종목인 무장행군경주에서는 우승 유력 학교인 부산2상을 일부러 가장 불리한 6코스에 배치시켰고, 부산2상이 1위로 달리자 반칙을 선언하여 결국 우승을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민족적 차별에 두 학교 학생들은 울분과 의분을 참지 못하여, 폐회식 마지막 식순인 일본 국기 하강식때 일본 국가 대신 우리의 애국가와 아리랑을 불렀고, "노다이 죽여라!", "왜놈 죽여라!"고 절규하였다. 1000여명의 양교생 들은 시위행진을 벌이고, 4, 5학년을 중심으로 약 400명의 학생들은 노다이 관사를 습격하여 외등과 유리 창문을 모조리 깨어버렸다.
노다이사건은 불과 1일간의 항일투쟁이었으나 엄중한 일제의 보도 통제 속에서도 우리 학생들의 민족정기는 전국에 널리 메아리쳐 갔다.

■ 비밀결사운동

비밀결사 조직으로는 1910년 부산상업학교 학생 변상태. 최기택 등 6인이 결성한 대붕회 (大會)와 1915년 부산상업학교 재학생 오택과 박재혁 등 10여명이 결성한 구세단(救世團)으로 3·1독립운동의 전개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후 1940년에 일어났던 부산공설운동장에서의 부산항일학생운동(노다이 사건)의 영향으로 1942년 동래중학생들의 「조선독립당(朝鮮獨立黨)」과 1944년 부산진보통 학교 졸업생들의 「순국당(殉國」 등 비밀결사가 태동되었다.
순국당은 학생, 사회인 등 구성원이 다양하고, 활동범위가 경남지역과 일본·만주 로까지 이어져 우리 민족의 저력을 과시하였다.

■ 조선청년독립당(朝鮮靑年獨立黨)

조선청년독립당은 노다이 사건때 퇴학당한 남기명과 동래중학 재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독서회로, 강령으로 '우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를 내걸었다.
이 조직은 군사기밀을 내사하고 순국당 등과 연계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순국당 당원 차병곤이 체포되면서 발각되었다.

■ 순국당(殉國黨)

순국당은 1944년 5월 부산진보통학교 졸업생 차병곤·박정오·신정호 등 13명이 참가하여 결성되었으며, 강령으로 민족독립, 주권회복을 위하여 투쟁한다'를 내걸었다.
항일투쟁을 1·2·3·4차로 계획하고 실천에 옮겼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모두 만주로 가서 독립군에 합류하기로 결의하고 실행하다 당원 전원이 검거되었다.
행동목표
① 고이소 총독 암살
② 일군시설의 파괴
③ 일본인 집단거주지(현재 광복동, 남포동)에 대한 방화
④ 은행습격
⑤ 공습시 산불 놓기

일제 말기 학생운동

민족지성을 표방한 학생들은 1919년 일본 동경유학생의 2·8독립선언에 이어 3·1독립운동과 같은 거대한 민족운동에 전위적인 역할과 식민교육이라는 학원 내의 모순에서 도전의 주체로 부상하여 농민·노동·여성운동 등 사회운동 등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0년대에는 조선학생회 발족을 시발로 학생조직 체가 만들어진 이후 6·10만세운동과 맹휴운동에 이어 광주학생운동으로 발전하였고, 1920년대 이후 항일운동은 노동운동과 아울러 청년학생들의 항일투쟁으로 급속히 성장. 강화되었다.
1930년대 만주사변 이후 학생들은 학원내 배속장교 배치 등 학원에 대한 사찰과 탄압이 가중되자 농촌계몽운동, 민족야학개설, 학생반전운동, 문화운동, 비밀 결사운동으로 학생운동을 이어오다가 1943년 5월 대규모 맹휴항쟁을 계기로 광복의 역군으로 참여하기 위해 무력항전을 계획하는 등 독립군적 성격을 띄면서 발전하였다.
부산 서구 동대신동2가 99-11 중앙공원에 왔다. 민주공원 왼쪽은 충혼탑이 있는 중앙공원이고, 오른쪽은 대한해협전승비, 4.19희생자 위령비 등이 있는 민주공원이다. 또한 이곳에는 소해 장건상 선생의 동상과 독립투사 최천택 선생 기념비도 같이 있다.
부산광복기념관
부산광복기념관
부산 광복기념관은 1876년 부산항이 개항한 이후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일본의 침략상과 그에 항거한 부산 지역항일 독립 투쟁의 역사적 유물을 전시함으로써, 우리 선인들의 숭고한 민족정신과 광복활동을 길이 선양 전승하고 아울러 자라나는 후손들의 올바른 국가관을 확립하기 위하여, 시민의 뜻을 모아 2000년 8월 15일에 개관하였습니다. 2층 전시실에는 부산 독립 운동의 약사를 비롯하여 다양한 부산지방의 항일 독립 운동의 실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순국선열 애국지사 위패봉안소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생존권을 회복하기 위해 거룩하게 신명을 바치신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 영전에 삼가 옷깃을 여미고 명복을 비옵니다.
민족대표 33인
부산지역 독립운동 유적지
이수강 선생 흉상 / 조정환 선생 흉상 / 구포장터 3·1독립운동 기념비 / 일신여학교 만세운동 기념비 / 범어사 3·1독립운동 유공비 / 3·1독립운동 유공비 / 기장 3·1독립운동 의거비 / 박영준 의사 기념비 / 일제만행 희생자 위령비 / 3·1독립운동 기념탑 / 항일운동 기념탑 / 안찬복 선생 추모비 / 박재혁 의사 동상 / 박재혁 의사비 / 백산 안희제 선생 흉상 / 소해 장건상 선생 동상 / 김근도 선생 흉상 / 항일 무명용사 위령비
부산 독립 운동사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부산항은 근대 개항 이래 일제의 조선침략을 위한 발판이었으며 일찍부터 많은 일인들이 거주해 왔다. 이로 인해 부산항내의 도심지역은 모두 일본인들의 손아귀로 넘어갔으며 조선인은 변두리 지역으로 밀려났다. 또한 일본 상인들이 관세없이 기계제품과 일상 생활품을 다량으로 유입하면서 부산의 수공업은 심각한 타격을 받아 해체되었고, 가중되는 수탈로 부산인의 생활은 거의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횡포와 불법적 행위는 부산인의 저항심과 항일 적개심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쌓이고 쌓인 일제에 대한 적개심은 1916년 9월 13일 부산진의 전차 교통사고를 계기로 순식간에 수천명의 항민(港民)들이 봉기하게 만들었다. 이 봉기로 항민(民)들은 철도를 차단하는 항일 시위를 벌였고, 이후 더욱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 비밀결사운동
부르주아층에 의한 비밀결사조직으로는 대동청년단과 조선국권회복이 있으며, 경북과 경남지역의 연대조직에 부산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인사들이 참여하는 양상을 보였다. 1920년대에 일제의 문화정치 실시로 합법공간이 확대되면서 국내 부르주아층은 문화운동에 보다 주력하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비밀결사운동은 상해 임정의 내부적 갈등 및 의열단의 침체로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쇠퇴하게 되었다.

■ 조선국권회복단
조선국권회복단은 1915년 대구를 중심으로 경북지방의 부호 중산층이 조직한 것으로 일부 경남 인사 이조원, 안희제, 정인찬 등이 참여하였다. 이러한 비밀결사의 조직적 활동과 인맥은 부산지역 3.1독립운동의 전개에 영향을 끼쳤다.

■ 대동청년단
대동청년단은 1909년 10월경 주로 경남·북의 계몽적 지식인 안희제·김갑 등 17~30세의 청년 80여명으로 결성되었으며, 당시에는 대개 학생이었으나 이후 부르주아 민족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명단]
단장: 남형우 / 부단장: 안희제(2대 단장) / 단원: 서상일, 윤현진, 이호연, 장건상, 윤병호, 이경희, 최병찬, 윤경방, 차병철, 백광흠, 이극로, 김갑, 윤상태, 오상근, 김사용, 서세충, 신백우, 박중화, 윤세복, 신성모, 신팔균, 민 강, 최윤동, 송전도, 김관제, 최완, 배천택, 신상태, 곽재기, 김홍권, 이범영, 이병립, 박광, 서초, 김홍량, 최인환, 김동삼, 김삼, 고병남, 김규환, 김태희, 임현, 남백우, 김기수, 신채호, 이시열, 고승흠, 이학수, 이우식, 이수영, 박영모 등
[단규]
① 단원은 반드시 피로 맹세할 것
② 새단원의 가입은 단원 2명 이상의 추천을 받을 것
③ 단명이나 단에 관한 사항은 문자로 표시하지 말 것
④ 경찰이나 기타 기관에 체포될 경우 그 사건은 본인에만 한하고 다른 단원에게 연루시키지 말 것
부산 3.1독립운동 의거도

■ 동래 범어사 학생의거(1919.3.18~19)
3월 4일 범어사 출신 김법린과 김상헌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부산으로 내려와 독립만세를 준비하였다. 3월 18일 시위를 전개하려는 이들은 친일파 오계운의 밀고로 중단하고 19일 희생을 각오하고 동래 시장통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 구포장터 의거(1919.3.29)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 양봉근과 임봉래, 윤경, 류기호 등이 3월 29일 정오 구포장터에서 장꾼 1,000여 명과 독 립만세를 외치며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 명호시장(市場) 의거(1919.4.10)
4월 9일 명지면에 있는 사립동명학교 교사 이진석은 양왕석과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문을 등사해 4월 10일 김청천, 서갑순 등과 학생·군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어 이진석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1백여명의 군 중도 독립만세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 가덕진(加德鎭) 의거(1919.4.11)
4월 11일 가덕도 유지 양흥석이 동지 최세권, 김동항과 독립만세를 외치며 가덕진 각 마을을 돌아다니자 주민들도 이에 합세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 좌천(佐川)시장 의거(1919.4.8)
기장군 교리의 김수용에게서 독립선언문을 입수한 오해환과 오진환, 신두성, 김윤희 등 청년들은 4월 8일 좌천장날 5~6백명의 농민들을 모아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 일광(日光) 의거(1919.4.5)
4월 5일 김도엽, 권철암, 구수암 등이 기장읍 장터에서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단」이라고 크게 쓴 큰 기를 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쳤다.
이에 장꾼들이 합세하여 만세를 부르고 시위행진을 전개하였으며, 망건 장사를 하던 박영준도 의분을 억제할 수 없어 장꾼들을 선동하여 읍내를 돌면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 기장(機張)읍 의거(1919.4.5)
김수문이라는 마부(馬夫)가 동래에서 주워 온 독립선언서를 보고 독립의지를 느낀 김도엽, 권철암, 구수암 등 7인은 기장장날인 4월 5일 기장읍 장터로 나가 대한독립 만세를 연호하였다.
이에 시장은 삽시간에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로 변하였고, 군중들도 합세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 일신여학교 의거(1919.3.11)
3월 23일경 독립선언서가 비밀리에 서울에서 부산의 학생대표단에게 전해져 일신여학생들은 의거를 준비하였다. 3월 11일 오후 9시경 고등과 김응수, 송명진, 김반수 등 11명과 주경애·박시연 교사는 태극기를 손에 들고 좌천동 거리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 동래고보 장터의거(1919. 3. 13)
동래고보 졸업생 곽상훈이 몰래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와 독립만세기, 광무황제의 독살을 폭로하는 「오왕약살(吾王藥殺)」 전단을 3월 13일 군청 앞 망미루에서 뿌렸다. 이에 주위에 모였던 수천명의 장꾼들도 일제히 독립만세를 부르고 합세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일신여학교의 3.1독립운동

1910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우리의 주권을 빼앗긴 역사적 배경속에서 교육 학교인 받고 자란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부산의 항일운동에서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3월 23일경 독립선언서가 비밀리에 서울로부터 부산의 학생대표단에게 "전해지면서 일신여학교는 의거 준비를 서두르게 되었다.
이때 일신여학교 측에서는 학생 이명시가 연락을 담당하였으며, 주경애·박시연 선생은 부산상업학교 학생들과 연락을 취하고, 일신여학교 동료 교사들을 규합하였다. 또한 3월 10일에는 학생들이 기숙사에서 혼수감으로 준비한 옥양목으로 태극기 100여 장을 만들어 11일의 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11일 오후 9시경 고등과 학생 김응수, 송명진, 김반수 등 11명과 주경 애·박시연 교사는 준비한 태극기를 손에 들고 좌천동 거리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일신여학교 어린 소녀들의 항쟁은 부산·경남 3.1독립운동의 효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상 그 의의가 높다고 하겠다.

3·1독립운동의 주역
뒷줄 좌로부터 김응수, 김봉애, 김애련, 김복선, 김순이, 문복순, 주경애, 박시연
앞줄 좌로부터 박연, 송명진, 박정수, 김반수, 심순의, 김란출, 이명시

박차정(4회)
조선청년동맹(朝鮮同盟) 및 근우회(槿友會) 동래지부 회원 활동

3·1독립운동의 주역
양귀염(1회), 김반수(7회), 김응수(8회)

독립의 얼을 다지며 태극무늬를 수놓은 밥상보(1919년) / 가출옥 증표(1919년) / 광복을 맞이하여 3·1독립운동을 주동한 동문이 쓴 감상담
부산항일학생운동(일명 노다이사건)

이 디오라마는 1940년 11월 23일 제 2회 경남학도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慶南學徒戰力増强國防競技大會)에서 심판장인 일본인 노다이[乃台兼治] 대좌의 한국학생에 대한 편파적 심판판 정에 불만이 고조되어 일어난 항일학생운동으로 동래중학(현 동래고등학교) 학생과 부산2상(釜山二商, 현 부산상업고등학교) 학생이 중심이 되어 전개하였다.
이 사건은 불과 1일간의 항일투쟁이었으나 일제말기 삼엄한 전시체제하에서 폭악한 일제에 항거하여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발휘한 학생의거이며, 일제말기 국내에서 전개된 대규모의 학생 운동으로서 만약 일제의 엄중한 보도통제만 없었더라면 이 사건은 광주학생운동보다도 더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