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포장터3.1운동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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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1065
탐방로그
구포장터 3.1운동 기념비가 있는 부산 북구 구포동 1065를 찾아왔지만,
저쪽은 차량을 세울 수 없고, 반대편 이곳에서는 접근이 불가능하다.
조금 떨어져 있는 구포역에 차량을 세우고 산책로를 통해 접근이 가능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조금 떨어져 있는 구포역에 차량을 세우고 산책로를 통해 접근이 가능했다.
경성의학 전문학생 양봉근은 구포 면서기 임봉래와 윤경 등과 1919년 3월 27·28일 박영초·이수련 집에 모여 3월 29일 구포장날을 거사날로 정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고, 큰 태극기 하나와 '대한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현수막도 만들었다. 3월 29일 정오 박덕홍·손진태·김장학·이몽석·양대용·김영길·정치호·정용학·안화중·허희중 등 청년동지들과 비밀리에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고 장꾼 1,000여 명과 더불어「대한독립만세」를 연이어 크게 외쳤다. 시장은 삽시간에 흥분과 감격의 도가니로 화하였다.
일부는 시위를 위하여 시장 철시를 호소하면서 장꾼을 지휘하였고 김윤길 등은 구포면사무소로 달려가 면장에게, 민족적 양심으로 뉘우치고 동참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후 김옥겸 외 11명의 주도인물이 구포 주재소에 구금되자 임봉래·윤정은 등은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로 돌진하여 구금된 동지들을 구출하려고 하였다. 일제 경찰들은 시위군중들에게 무차별 총탄을 퍼붓었다. 이 과정에서 일군경 3명과 한국인 경찰 1명이 중상을 입었고, 시위 군중들 중에는 9명의 부상자가 생겼다. 재판에 회부된 인물은 42명으로 대부분이 20-30대의 청년들이었다.
부산광역시 북구청지명위원회에서는 광복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1995년 9월 28일 구포역앞 - 구포시장통 - 대리천 복개도로까지 도로를 구포 만세거리로 지정하였다.
龜浦장터 三.一運動 紀念碑(구포장터 3.1운동 기념비)
구포장터 3.1운동 기념비 비문

겨레의 젖줄인 낙동강은 빼앗긴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이 고장 사람들이 피 흘리며 항쟁했던 3.1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가슴에 안고 오늘도 유유히 흘러 내리고 있다. 강물따라 뱃길을 오르내린 큰 나루터가 있었던 강변의 장터에서 지역 청년들이 주도하여 일으킨 만세운동은 천여명 장꾼들의 가슴과 가슴으로 뜨겁게 이어져 하나같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왜경의 총칼 앞에서도 맨몸으로 싸웠고 그들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당당하게 독립을 주장하다가 끝내 옥살이를 해야 했던 역사적 사실은 이 고장에도 민족혼이 살아 잇음을 증명해 주었다. 참으로 거룩하고 자랑스러운 구포장터 항일투쟁의 혈맥을 후대에 길이 물려주기 위하여 8.15 광복 제50주년을 맞아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강둑 위에 3.1운동 기념비를 세운다. 구포장터 3.1운동에 앞장선 분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 서울 3.1운동소식과 독립선언서를 전달한 분 : 楊奉根(양봉근)
○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신 분(42명)
金玉兼(김옥겸) 柳基護(류기호) 朴德弘(박덕홍) 鄭致浩(정치호) 許希中(허희중) 孫晋泰(손진태) 李夢石(이몽석) 梁泰鎔(양태용)
權龍鶴(권용학) 金章鶴(김장학) 尹 涇(윤 경) 金永吉(김영길) 安華重(안화중) 林鳳來(임봉래) 金閏吉(김윤길) 兪鎭榮(유진영)
金用伊(김용이) 尹大根(윤대근) 崔宗鎬(최종호) 許 楨(허 정) 金達洙(김달수) 尹正殷(윤정은) 白仁鳳(백인봉) 尹敬泰(윤경태)
姜碩伊(강석이) 許致玉(허치옥) 邊泰燁(변태엽) 朴龍水(박용수) 盧源弼(노원필) 尹張守(윤장수) 朴永初(박영초) 都宇黃(도우황)
朴道伯(박도백) 金德元(김덕원) 趙海奎(조해규) 申性執(신성집) 朴碩五(박석오) 姜斗兆(강두조) 陳有寬(진유관) 盧源吉(노원길)
崔漢奉(최한봉) 鄭泰浩(정태호)

일천구백구십오년 팔월 십오일 삼십만 북구민의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우다
구포장터 3.1운동 기념비
⦁ 관리번호 : 40-1-21 / ⦁ 관리자 : 부산시 북구청장
1919년 3월 29일 구포장터에서 일어났던 3.1만세운동을 기념하고 만세운동에 참가한 선열들의 민족혼을 기리기 위하여 광복 50주년인 1995년 8월 15일 조성하였다. 구포장터 3.1운동은 경성의전에 다니던 양봉근(楊奉根)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지역 청년들이 주도하였다. 3월 29일 정오. 청년들과 장날을 맞아 모인 장꾼, 농민 노동자 등 1,000여명이 구포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벌였다. 무자비하게 총칼로 제지하는 일경에 의해 9명이 부상을 입고 주동자 42명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는 등 고초를 겪었으나 구포 지역 주민들의 굳센 독립 의지를 만천하에 보여준 의거로 기록되고 있다. 기념비의 뒷면에는 구포장터 3.1운동에 앞장 선 43분의 이름을 새겨 후세에 남기고 있다. 해마다 3월 29일에 즈음해 구포장터 3.1만세운동 재현행사를 열고 온 몸으로 일제에 항거한 구포 주민들의 민족정신을 면면이 이어가고 있다.
구포장터 3.1운동 기념비가 있는 부산 북구 구포동 1065를 찾아왔지만,
저쪽은 차량을 세울 수 없고, 반대편 이곳에서는 접근이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