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천택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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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1400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박재혁을 기다리는 최천택 선생

일제 강점기 부산경찰서 폭파사건 거사를 함께 했던 박재혁 의사와 최천택 선생은 각각 범일동과 좌천동에서 태어나 부산상고(현 개성고등학교) 시절을 함께한 막역한 사이였다. 최천택 선생은 부산 경찰서 폭파 사건 후 운명을 달리한 박재혁 의사의 시신을 수습하여 증산의 공동묘지에 묻었지만, 역사적 의미와 애환이 담긴 이곳에 동물원 사업(1961년 5월~1963년 6월)이 추진되면서 박재혁 의사의 묘는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현재 증산공원 인근 옥성사에 남아 있는 최천택 선생의 묘비만이 고향을 잊지 못하는 박재혁 의사의 넋을 기다리고 있는 듯 하다.
부산 동구 범일동 1400 좌성초등학교 담벼락
이 부근이 최천택 길 같은데, 정작 거리 표시판은 찾을 수가 없다.
부산의 부산 이바구길 110
「부산경찰서 폭파사건 내 사지가 찢어진들 어때」
부산경찰서 폭파 하루 전 박재혁과 최천택은 부산경찰서가 빤히 보이는 용두산(공원)으로 올라가 내일의 거사 계획을 의논했다. 1920년 9월 13일 박재혁은 중국 헌책장사로 가장하여 서장 파에서 폭탄을 터뜨려 경찰서장은 절명하였고 박재혁은 오른쪽 무릎뼈에 중상을 입어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이윽고 최천택도 경찰서로 붙잡혀갔다. "내 한 몸 희생하여 동지를 구할 수 있다면 내 사지가 찢어진들 어때." "폭탄이 터지고 (성공하고) 우왕좌왕 하는 사이에 박 의사가 도망가면 내가9최천택) 거기 앞에 있다가 주모자로 잡혀 사흘을 버틸테니 사흘안에 조선땅을(국경을) 완전히 빠져나가라." - 거사 직전 박재혁과 나눈 대화 -
「동국역사책 사건 혼자서 했다」
일제는 우리의 민족정신과 정기를 말살시키기 위해 역사책을 보는 것도 법으로 금지하고 불살랐는데, 1912년 부산상업학교 2학년 때 "빼앗긴 나라를 찾는 길은 바로 조선 역사를 알리는 일이다."라고 결심했다. 얼마 후 '동국사기'를 인쇄 배포한 사실이 탄로나서 '최천택'은 경찰서에 검거되어 모진 심문을 받았다.

"조선역사책을 보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이 사실을 아는가?" "알고 있다."
"그러면 왜 보았는가?" "내 나라 역사를 아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동국역사책은 어디서 구했는가?" "말할 수 없다."
"누구와 등사를 했는가?" "혼자서 했다. 더 묻지 마시오."
독립투사 최천택 선생(1896~1961)
1896년 6월 1일 부산 좌천동에서 태어나 부산진초등학교를 거쳐 부산공립상업학교(전 부산상고, 현 개성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부산상고 2학년(17세)때, 우리 민족의 얼이 담긴 국사책 '동국사기'를 등사기로 인쇄하여 학우들에게 나누어 주다가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체포 구굼된 것을 시작으로 절친한 친구이자 구국 동지인 박재혁 의사와 함께 부산경찰서 폭파사건(1920.9,14) 등 33년 동안 무려 54회나 체포, 구속, 구금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하지만 동지의 이름이나 투쟁행적을 고해 바쳐 목숨을 구걸하지도 않고 동지와의 의리와 신뢰를 소중히 여기고 약속을 생명처럼 지켜내는 올곧은 성품과 기개를 지닌 애국투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