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 1564
- 탐방로그
- 부산 남구 대연동 1564 동천고등학교 내 애국지사 순흥 안찬복 지사 추모비를 찾아왔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백설이 대지를 덮어도 송죽의 푸름은 변치 않고 총칼이 생명을 겨누어도 의사는 지조를 굽히지 않나니 자연은 상록의 수목으로 아름다움을 더하고 인류 역사는 불굴의 절의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감이라 저 포악한 왜적이 우리 국토를 강점했을 때 목숨을 던져 구국의 선봉에 나선 선열들이 아니계셨던들 어찌 우리 문화와 역사가 온전하였으리오 이 황령산기슭에 청석을 세워 안찬복 공의 행적 일단을 새기는 이유에 있다.
공의 도호는 설암이요 본관은 순흥이니 고려조 신호위 상호군 휘 자미가 시조이며 삼전하여 휘 유가 도학을 창명함으로써 문성의 시호와 문묘의 배향을 받은 이후 대대로 고학과 숭덕이 끊이지 않았음은 세인이 주지하는바 조선조 세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판서에 오른 휘 지석이 단종 선위에 절의를 지켜 평안도 안주에 복지 이거한 후 자손들의 세거지가 되었는
공의 도호는 설암이요 본관은 순흥이니 고려조 신호위 상호군 휘 자미가 시조이며 삼전하여 휘 유가 도학을 창명함으로써 문성의 시호와 문묘의 배향을 받은 이후 대대로 고학과 숭덕이 끊이지 않았음은 세인이 주지하는바 조선조 세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판서에 오른 휘 지석이 단종 선위에 절의를 지켜 평안도 안주에 복지 이거한 후 자손들의 세거지가 되었는
데 공의 17대조이다. 아버님은 휘 기정이요 어머님은 당악 김씨 광도의 따님으로 포덕 22년 서기 1881년 안주 송성리 본가에서 태어나니 어릴 적부터 총명이 과인하여 가문의 촉망을 받았고 19세에 동학에 입당하여 인내천의 사상과 사인여천의 윤리를 실천하면서 용화면 울담리에 교당 겸 서숙을 건립하여 포덕과 교육에 심혈을 쏟으니 따르는 사람이 구름 같았다. 포덕 45년 갑진 개화운동에 앞장서서 항일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취하였고 경술국치를 당하매 비분강개하여 설교와 강연으로 국권회복을 역설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여러 동지들과 치밀한 계획을 세워 3월 3일 안주 율산공원에 5천의 군중을 모아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헌병대를 포위하였는데 그들이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내었고 공도 결국 체포되어 2년 반의 형을 복역하였다. 출옥 후에도 교당을 지키면서 포덕과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포덕 85년 4월 징병되어 나가는 교인 자제 13명에게 일본의 패망과 조국광복이 눈 앞에 다가왔음을 강조한 일로 다시 헌병대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 끝에 8개월 징역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몽매에도 그리던 민족해방을 수개월 앞두고 포덕 86년 1월 9일 향년 65세로 옥사 순국하니 묘소는 신안주면 용운리 앞산이다.
배위는 해주김씨 경서의 따님인데 부덕모의를 갖추어 포교와 치산과 자녀교도에 정성을 다하다가 공보다 10년 앞서 포덕 76년에 별세하였고 묘소는 공 묘 옆산이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으니 남에 관성 관석 관명이요 녀서는 선산 길용중 경주 최광수이며 관성의 자에 원철이요 관석의 자에 원도 원교이다. 관성은 6.25사변에 남하하여 근검절약으로 정재를 모아 동천고등학교와 부산예술전문대학을 설립하여 공의 유지를 받들고 있고 그 밖의 자손들도 모두 나라와 천도교를 위
배위는 해주김씨 경서의 따님인데 부덕모의를 갖추어 포교와 치산과 자녀교도에 정성을 다하다가 공보다 10년 앞서 포덕 76년에 별세하였고 묘소는 공 묘 옆산이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으니 남에 관성 관석 관명이요 녀서는 선산 길용중 경주 최광수이며 관성의 자에 원철이요 관석의 자에 원도 원교이다. 관성은 6.25사변에 남하하여 근검절약으로 정재를 모아 동천고등학교와 부산예술전문대학을 설립하여 공의 유지를 받들고 있고 그 밖의 자손들도 모두 나라와 천도교를 위
해 헌신하고 있으니 이 또한 공의 유덕의 소치리라. 오호라 공이 가신지 어언 반세기 조국은 광복되었어도 국토는 양단되어 남에 있는 자손들이 북에 있는 공의 유택마저 찾을 길이 없어 여기 비를 세워 추모의 정을 담고 또 연전에 정부에서 공의 위국충절을 기려 건국훈장을 추서하였으니 구천에 계실 성영에 보답하는 길이라 하겠다.
공의 백절불굴의 지조와 보국안민의 행적은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영원하리라.
포덕 133년 서기 1992년 3.1절
후학 인천 이태길 삼가 짓고 월성 박명찬 삼가 쓰다
공의 백절불굴의 지조와 보국안민의 행적은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영원하리라.
포덕 133년 서기 1992년 3.1절
후학 인천 이태길 삼가 짓고 월성 박명찬 삼가 쓰다
부산 남구 대연동 1564 동천고등학교 내 애국지사 순흥 안찬복 지사 추모비를 찾아왔다.
천도교도사 애국지사 순흥 안찬복 공 추모비
순흥(順興) 안찬복(安贊福, 1881~1945) 공은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나 독실한 천도교인으로 생활하면서 3.1운동 당시 안주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가 체포되어 2년 6개월의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44년 4월 교인 자제 13인이 징집될 때 그들에게 일본의 패망과 조국 광복을 역설하여 다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향년 65세로 옥사 순국하였습니다.
국가보훈처가 현충시설물로 지정한 이 추모비는 안찬복 지사의 애국충정을 계승 발전시키고 올바른 가치관과 애국심을 고양시키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기 때문에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순흥(順興) 안찬복(安贊福, 1881~1945) 공은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나 독실한 천도교인으로 생활하면서 3.1운동 당시 안주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가 체포되어 2년 6개월의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44년 4월 교인 자제 13인이 징집될 때 그들에게 일본의 패망과 조국 광복을 역설하여 다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향년 65세로 옥사 순국하였습니다.
국가보훈처가 현충시설물로 지정한 이 추모비는 안찬복 지사의 애국충정을 계승 발전시키고 올바른 가치관과 애국심을 고양시키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기 때문에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天道敎道師 愛國志士 順興 安贊福公 追慕碑
(천도교도사 애국지사 순흥 안찬복공 추모비)
(천도교도사 애국지사 순흥 안찬복공 추모비)
天道敎道師 愛國志士 順興 安贊福公 追慕碑
(천도교도사 애국지사 순흥 안찬복공 추모비)
(천도교도사 애국지사 순흥 안찬복공 추모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