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방곡리 247-9
- 탐방로그
-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방곡리 247-9 구 정관초등학교 내 3.1운동 의거비를 찾아왔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부산 기장군 장안읍 기룡리 509-3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방곡리 247-9 구 정관초등학교 내 3.1운동 의거비를 찾아왔다.
3.1운동 의거비
3.1운동시 좌천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기념하여 건립한 의거비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정관면에서는 기장군 교리 김수용으로부터 독립선언문 여러 부를 오해영이 입수하여 오진환.김종복에게 전달하였고, 오진환.신두성.김윤희.정지모.박일봉 등 면내의 유지들이 주동이 되어 김종복의 사랑방을 밀회 장소로 정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3월 9일(음) 좌천 장날을 기해 장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 이에 이들은 목욕재계하고 조룡산 산마루와 용산암에서 대한독립만세와 의거의 성공을 기원하는 천제를 지낸 다음 혈서구국의 맹세를 하였다. 3월 9일(음), 좌천시장에 각 처에서 운집한 장꾼들이 붐빌 적에 오진환 등 5명의 동지들은 그에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니 주위의 수많은 군중들이 합세하였다. 일경들은 야만적인 방법으로 무차별 발포하여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오진환 등 50여명이 좌천주재소로 연행되자 시위 군중들은 주재소를 2중 3중으로 포위하여 투석전을 벌리며 석방을 요구하여 연행자 전원을 구출하기도 하였다. 그 뒤 신두성.김윤희.정지모 등은 검거.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고,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위반이란 죄명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김윤희.정지모는 고문의 여독으로 순국하였고, 신두성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사망하였으며, 오진환은 일경의 눈을 피하여 상해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박일봉은 국내에서 피신하여 해외를 전전하다가 한많은 일생을 마쳤다.
3.1운동시 좌천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기념하여 건립한 의거비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정관면에서는 기장군 교리 김수용으로부터 독립선언문 여러 부를 오해영이 입수하여 오진환.김종복에게 전달하였고, 오진환.신두성.김윤희.정지모.박일봉 등 면내의 유지들이 주동이 되어 김종복의 사랑방을 밀회 장소로 정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3월 9일(음) 좌천 장날을 기해 장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 이에 이들은 목욕재계하고 조룡산 산마루와 용산암에서 대한독립만세와 의거의 성공을 기원하는 천제를 지낸 다음 혈서구국의 맹세를 하였다. 3월 9일(음), 좌천시장에 각 처에서 운집한 장꾼들이 붐빌 적에 오진환 등 5명의 동지들은 그에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니 주위의 수많은 군중들이 합세하였다. 일경들은 야만적인 방법으로 무차별 발포하여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오진환 등 50여명이 좌천주재소로 연행되자 시위 군중들은 주재소를 2중 3중으로 포위하여 투석전을 벌리며 석방을 요구하여 연행자 전원을 구출하기도 하였다. 그 뒤 신두성.김윤희.정지모 등은 검거.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고,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위반이란 죄명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김윤희.정지모는 고문의 여독으로 순국하였고, 신두성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사망하였으며, 오진환은 일경의 눈을 피하여 상해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박일봉은 국내에서 피신하여 해외를 전전하다가 한많은 일생을 마쳤다.
三.一運動 義擧碑(3.1운동 의거비)
三.一運動 義擧碑(3.1운동 의거비)
어찌 반만년 역사의 찬란한 문화를 지닌 우리 겨레가 1919년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게 되었다. 빼앗긴 국토와 잃은 자유를 찾으려고 하는 2천만 겨레의 굳은 의지는 드디어 1919년 3월 1일에 일제 무단정치의 강압 속에서도 감연히 폭발하였다. 방방곡곡에 만세소리가 하늘에 우러퍼지고 태극기의 물결은 사람들의 가슴에 애국충정을 끓어올렸다. 3월이 가고 4월이 되매 독립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더욱 민중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4월 3일에는 기장읍에서 크게 거사하였는데 이 영향은 정관면에도 자극한 바가 많았다. 오진환 신두성 김윤희 정지모 박일봉 등 면내 유지들은 나라 사랑하는 구국충정을 참지 못하여 앞장서서 면민을 일깨우고 만세를 불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가며 거사할 모의를 하여 좌천장날(음 3월 9일)을 기해 장터에서 만세
를 부르기로 하였다. 이에 앞서 이들은 제계목욕하여 몸을 앍히고 조룡산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하여 거사의 성공을 빌고 모든 준비를 갖추는 동시에 결사보국의 맹세를 굳게 하였다. 장한 일이다. 대사를 앞에 두고 하늘에 기원하는 심정은 옛 조상때부터의 일이니 이들의 거사는 결코 일시적인 충동에서 생각한 것이 아니라 깊은 마음의 뿌리가 있어 한 일이라 하겠다. 음 3월 9일 좌천장날 각 면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붐빌 적에 오진환을 비롯한 다섯 사람의 동지와 그들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숨겨 가진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니 수 많은 군중들이 이에 호응하여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일본경찰이 이를 제지코자 무차별 발포하여 많은 부상자를 내고 오진환은 주모자로 수비대들에 의하여 주재소에 안치되였으나 군중의 강한 반발로 간신히 구출되었다. 그 뒤 일경은 독립의사들을 차례로 검거하여 혹독한
고문을 가하고 보안법 위반죄로 옥고를 치루게 하였는데 출감 후에도 고문의 여독으로 신음하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다고 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경찰의 눈을 피하여 그늘에서 살아야 할 사람들도 있었으며 오진환은 해외로 망명하여 있다가 해방된 뒤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 빼앗긴 조국과 잃었던 자유를 다시 찾아서 민족중흥과 조국 근대화를 경륜하는 오늘에 있어서 지난날 나라의 독립과 겨레의 자유를 위하여 싸우고 피 흘린 분들을 추모하는 정 간절하다. 3.1운동의 회갑을 맞이하여 면민의 뜻으로 이 비를 세우고 그 분들의 명복을 비는 동시에 후생에게 나라의 소중함을 일깨우고자 하는 바이다.
1979년(기미)년 4월 5일 문학박사 정중환은 글을 짓고 문동학은 글을 쓰다.
1979년(기미)년 4월 5일 문학박사 정중환은 글을 짓고 문동학은 글을 쓰다.
소천 한광덕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