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귀룡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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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면 두명리 산46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애국지사 김귀룡의 묘
안내판에서 35m의 거리라고 해서
안내판에 큰 탑이 그려져 있었다.
큰 탑은 수목이 우거져 있어서 갈 수 없고, 그 앞에서 찾을 수 있었다.
獨立鬪士 金海金公 貴龍 之墓(독립투사 김해김공 귀룡 지묘)
애국지사 묘소 안내판과 뒤편에 보이는 높은 탑과의 사이에 애국지사의 묘소가 있었다.
박희봉, 김기범 선생의 묘소 안내판을 주변을 돌며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박희봉은 경북 상주(尙州) 사람이다. 그는 조선약학교(朝鮮藥學校) 재학 중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의 낭독이 끝난 후 수천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일본 동경(東京)에서 2·8독립선언 이후 국내에서도 만세운동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 진행될 때, 그는 조선약학교에 재학하면서 학우들과 함께 3·1운동의 계획에 참여하여, 만세운동 당일에 사용할 태극기 등을 제작하는 한편 동지규합에 힘을 쏟았다. 그는 학우들과 함께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식에 참가한 뒤, 시가 행진을 전개하였다. 이 때 박희봉은 시위행렬의 선두에 서서 보신각과 남대문 등지를 비롯하여 시내 각처를 행진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는 이 일로 일경에 붙잡혀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출옥 후 그는 계속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기로 뜻을 세우고 사회운동에 투신하였다. 3·1운동 직후 일제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 방침을 수정하여 소위 문화정치(文化政治)를 표방하면서 외형적이나마 집회·결사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따라서 민족운동세력은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전국적 조직을 만들어갔는데, 각 지방의 청년회들을 연합한 조선청년회연합회가 그것이었다. 박희봉은 조선청년회연합회의 결성 초기에 참가하여 1920년 7월 7일 조선청년회연합기성회의 지방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
김기범(金淇範) 선생의 묘소는 김종태 선생이 순직소방관 묘지 찾으러 갔다가 발견하여 사진을 보내주셔서 뒷부분에 추가하였습니다.
부산추모공원과 붙어있는 부산 기장군 정관읍 두명리 산 47 백운공원묘지를 찾았다.
이곳에는 애국지사 박희봉, 김기범, 김귀룡 그리고 이종률 선생의 묘소가 있다.
그런데 이종률 선생은 2021년 4월 10일에 대전현충원으로 이장이 되셨다.
白雲公園(백운공원)
묘소 위치를 몰라서 관리사무소에 문의를 할 예정이었는데, 관리사무소에 사람이 없다.
그냥 갈 수는 없고 혹시 독립유공자 묘소 안내판이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가다가 만난 안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