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규영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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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동 238
탐방로그
부산 금정구 선동 238 웰빙주말농장 등산로 입구 동래정씨 묘 지나서 있다는 애국지사 추규영의 묘를 찾아왔다. 동래정씨 묘를 지나자 바로 안내판이 보였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현 양자는 회산인 황영덕에 출가 호균 진배 호애 미애 양수는 영일인 정수해에 출가 경곤 태곤 재곤 진곤을 두었다. 1994년 10월 6일 상배 후 선생은 여생을 혼자 지내며 부인에 대한 신의를 다했고 자녀들을 자애로써 훈육하여 가문의 명성을 드높이고 자손들을 영달의 길로 인도했다. 1977년 3월 24일 장서하니 향년 75세 선생과 부인은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동 산록에 모셨다. 1986년 정부는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경봉 대선사가 전면을 쓰고 이종석은 찬하였으며 김응현은 서하다.
1998년 4월 일 립
부산 금정구 선동 238 웰빙주말농장 등산로 입구 동래정씨 묘 지나서 있다는 애국지사 추규영의 묘를 찾아왔다.
동래정씨 묘를 지나자 바로 안내판이 보였다.
애국지사 묘소안내(애국지사 고 경암 추규영) - 1986년 건국훈장 애족장 수여 -
* 주요공적 : 1903.8.21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에서 부산 동래지방의 선각자로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중.고등학교)와 동래일신여학교(현 동래여자중.고등학교)의 후원회장을 지낸 국촌 구봉찬 선생과 박명선 여사의 장남으로 태어나다.
* 경암 추규영 선생은 동래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운동을 시작하였다. 선쟁은 3.1운동이 일어나자 애국학생을 비밀리에 규합하여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 등을 제작하면서 만세운동을 치밀하에 주도하였다. 1919.3.13 정오에 동래 망미루 앞에서 장날에 모인 수많은 군중을 운집케하여 천지가 진동하는 만세운동을 전개함으로서 부산시민의 독립정신을 크게 고취시켰다. 당시 선생은 현장에서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16세의 어린나이에 1년의 옥고를 치럿다.
* 광복 이후 부산사세청장, 전남지사 등을 역임하면서 국가 건설에 헌신하였으며 1977.3.24에 타계하였다.
* 묘소위치 :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동 산록
애국선열의 위훈과 숭고한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이곳에 고이 잠들어 계시는 애국지사의 묘소 위치와 업적을 알리고자 합니다.
1997.12. 부산광역시 금정구청장
配 孺人 淸道金氏 之墓 丑坐 未向(배 유인 청도김씨 지묘 축좌 미향)
자 경석 휘석, 여 양자 양수 양옥
서기 1975년 4월 5일 립
鏡菴 秋溪秋公 圭映 之墓(경암 추계추공 규영 지묘)
鏡菴 秋溪秋公 圭映 之墓(경암 추계추공 규영 지묘)
경암 선생의 휘는 규영 본관은 추계이며 고려 충렬왕조 민부상서 예문관 대제학 로당 추적의 22세손이다. 1903년 8월 11일 부산 동래지방의 선각자로 유지들을 힘을 모아 폐교위기에 직면한 동래일신여학교를 오늘의 동래여자중고등학교로 중흥케 한 국촌 추봉찬 선생과 밀양인 박명선 여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천성이 총명강기했던 선생은 어려서 한학을 정진하다 동래고등보통학교에 진학 신학문에 접하면서 근대 민족주의 사상과 반일애국운동에 ○안하여 평생을 조국의 광복과 새나라 건설에 몸을 바쳤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16세 소년으로 학우들과 3월 13일 동래지방 시위운동을 주도하여 이해 4월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출판법 위반으로 1년형을 선고받고 1920년 봄 출옥하였다. 이후 선생은 옥고로 상한 몸을 무릅쓰고 국외 망명과 동경 유학을 시도하며 재기의 기회를 엿보다 마침내 뜻한 바 있어 1926년 서부경남 벽지 농촌에 들어가 농촌운동에 투신했다. 함양군 서상면 창령군 부곡면 고성군 배둔면 등지의 산촌으로 18년간 전전하며 선생이 심혈을 쏟은 일은 농민들의 문맹퇴치와 농가 소득 증대운동이었다. 신품종 감자를 보급시키고 흉년으로 굶주리는 농민들을 빚을 내어 구휼하는 등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헌신하니 그때 농민들이 세운 공덕비가 지금도 서상면 농협 정문에 서 있으니 이제총집 유수공 구황시급 ○○제○탄성목이위중모충만구일석영운덕숭의 송명을 각하였다. 1945년 광복 후 선생은 농협 경남지부 창설에 참여하고 이후 관계에 투신 1951년에는 부산사세청장으로 전시의 피폐한 세무의 기를 잡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피난 수도 부산지방은 전시 재정 조달의 터밭이기도 했다. 이때 불철주야 헌신적인 노력으로 1953년에는 전라남도지사에 천거되니 3.1운동에 소년입지한 그의 구국대장정에 겨레가 베푼 보답이었다. 전남지사 2년간 선생은 전쟁 중 해이된 이도를 쇄신하고 평생의 꿈인 농촌 근대화를 위한 농업기술을
발하며 광주학생운동의 선양을 통한 도민들의 애국정신을 진작하는 등 세가지 방침으로 일하였다. 선생은 몸소 검약을 수범하며 일말의 부정이라도 적발되는 공무원은 상하를 불문코 추상같이 문책했다. 1954년에는 광주서중 앞뜰에 광주학생운동기념탑을 세우고 광주학생운동 당시 제적되었던 희생자들을 복적시키니 이들의 항일의 기백으로 새나라 젊은이들의 정신적 기둥을 삼자는 선생의 간절한 뜻이었다. 그러나 휴전 후 점차 누적되는 자유당 정권의 비정으로 이같은 선생의 목민관으로서의 열망은 꺾이기 일쑤였으니 세 번 사의를 표하다가 1955년 2월 마침내 관직을 스스로 떠남으써 건국 초기의 청백리로 이도의 사표를 세웠다. 부인 김흥순 여사는 1907년 9월 13일생으로 청도인 김자현 선생과 김부이 여사의 장녀로 동래일신여학교를 나왔으며 경석 휘석 두 아들과 양자 양수 양옥 세 딸을 두었다. 경석은 동래인 정수자와 결혼 승우 재연 희정 휘석은 김해인 김영인과 결혼 종우 정현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