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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광역시 중구 장관동 1
- 탐방로그
- 국채보상운동기념비를 찾으러 대구광역시 중구에 왔다. 국채보상운동 기념비는 ‘국채보상운동 90주년’을 기념하여 1997년 10월 16일 세운 기념비이다. 국채보상운동은 우리 민족 최초 경제 구국 운동이자 구한말 민족 최대의 민족 운동이다. 국채보상운동 기념비는 국채보상운동이 우리 민족 자주 독립 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역사적인 운동임을 알리는 데 의의가 있다. 국채보상운동의 시작을 세상에 알린 옛 북후정 정자 터인 대구광역시 중구 태평로에 세워져 있다. 국채보상운동 기념비는 여영택이 글월을 맡고, 글씨는 정계조가 썼으며, 조형은 이상일이 맡았다. 2단 기단부 위에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오석으로 만든 직사각형 형태의 기둥 1개, 4분의 1로 잘라 놓은 타원형 형태의 기둥 2개, 원반 형태의 물건을 들고 있는 3명의 사람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봇짐을 든 장수, 한복을 입은 여성과 남성이 각자 한 손을 들어 원반 형태의 물건을 들고 있다. 국채보상운동이 성별, 신분, 직업에 상관없이 전 계층에서 참여한 것을 상징하기 위하여 3명의 사람의 성별과 직업을 나타내는 조형물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매년 2월 21일 국채보상운동기념식을 개최하고 있다. 국채보상운동 기념비는 2007년 5월 3일 대구지방보훈청에 의하여 현충 시설로 지정되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찬사
겨레 바탕 뛰어나나
갈기갈기 갈라지자
힘 모자라 억울하고
가난하여 서럽더라
이웃이라 도우는 척
덮어씌운 빚 덩어리
벗어 보자 횃불 든 곳
우리 대구 여기더라
삼천리 방방 곡곡
남녀 노소 가슴가슴
그 불길 활활 타서
광복으로 이어졌네
겨레 바탕 뛰어나나
갈기갈기 갈라지자
힘 모자라 억울하고
가난하여 서럽더라
이웃이라 도우는 척
덮어씌운 빚 덩어리
벗어 보자 횃불 든 곳
우리 대구 여기더라
삼천리 방방 곡곡
남녀 노소 가슴가슴
그 불길 활활 타서
광복으로 이어졌네
이웃이라 도운다던 일본이 일천삼백만원의 많은 빚을 가져와 우리를 침략할 터전 다지기에 쓰고 빚을 우리가 갚으라더라. 애국심으로 빚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운동의 횃불을 드니 19 07년 2월 21일 대구의 서상돈(徐相敦) 김광제(金光濟) 등으로 말미암아 담배를 끊고 패물을 팔고 푼돈을 모으는 바람이 온 나라에 불더라. 이 운동은 장차 3.1 독립운동과 불산 장려 등 애국운동으로 이어지더라. 이 정신을 기림은 대구의 자랑이요 나라 사랑의 기둥이다. 이 유서깊은 국채보상운동의 얼을 기리기 위해 대구시와 대구상공회의소는 운동 발의 90주년을 맞아 2 50만 시민의 힘으로 〈국채보상운동 기념비〉를 세우다.
1997년 10월 16일
대구광역시장 문희갑
대구상공회의소회장 채병하
검솔 여영택 글월
심재 정계조 글씨
이상일 조형
1997년 10월 16일
대구광역시장 문희갑
대구상공회의소회장 채병하
검솔 여영택 글월
심재 정계조 글씨
이상일 조형
국채보상운동기념비
국채보상운동기념비
1907년 1월 29일 김광제, 서상돈 등이 중심이 되어 국채보상운동을 발기하였으며, 동년 2월 21일 대구민의소(현 대구상공회의소 전신)가 북후정에서 국채보상 모금을 위한 대구군민대회를 개최하여 국채보상취지서를 낭독하였는데, 국채보상운동기념비는 이 뜻을 기리고자 건립되었다. 대구 북후정에서 군민대회가 개최되고 국채보상발기문과 국채보상취지서가 신문에 게재되자 이 운동은 실로 신분과 성별과 직업과 지역을 초월한 거국적 민족운동으로 확산되어 나가게 되고, 재외 동포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운동은 의연금의 출연은 말할 것도 없고, 단연·패물의연·땔감나무기부·식생활절약 등을 통해 외채를 갚는 경제주권회복운동이었다. 또한 일반평민이 주동이 된 한국최초의 시민운동이었으며, 부녀자들이 대거 참여한 한국최초의 여성운동이고, 나아가 전국민적 시민기부운동이기도 하였다.
1907년 1월 29일 김광제, 서상돈 등이 중심이 되어 국채보상운동을 발기하였으며, 동년 2월 21일 대구민의소(현 대구상공회의소 전신)가 북후정에서 국채보상 모금을 위한 대구군민대회를 개최하여 국채보상취지서를 낭독하였는데, 국채보상운동기념비는 이 뜻을 기리고자 건립되었다. 대구 북후정에서 군민대회가 개최되고 국채보상발기문과 국채보상취지서가 신문에 게재되자 이 운동은 실로 신분과 성별과 직업과 지역을 초월한 거국적 민족운동으로 확산되어 나가게 되고, 재외 동포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운동은 의연금의 출연은 말할 것도 없고, 단연·패물의연·땔감나무기부·식생활절약 등을 통해 외채를 갚는 경제주권회복운동이었다. 또한 일반평민이 주동이 된 한국최초의 시민운동이었으며, 부녀자들이 대거 참여한 한국최초의 여성운동이고, 나아가 전국민적 시민기부운동이기도 하였다.
국채보상운동기념비
국채보상운동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