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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광역시 중구 서야동 1-1
- 탐방로그
- 대구 중구 서야동 1-1 대성사 입구 주차장 국채보상 운동의 발상지 '광문사 터' 기념비를 찾았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여성 국채보상운동의 횃불을 높이 들고
국채보상운동은 여성들도 남자 못지않은 열과 성의로 적극 참여한 것이다. 남자들의 모금방법이 단연.단주인데 비하여 여성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절미.감찬.패물 등 가까운데서부터 실천하였다. 여성들의 운동 역시 대구.서울.부산 등 경향 각지에서 일어났는데, 이 운동을 제일 먼저 일으킨 여성들은 앞서 본 국채보상기성회가 발기된 그 이튿날인 2월 23일 대구남일동패물폐지 부인회를 결성하고 전국 부녀자들에게 보내는「경고아부인동포」라는 격문은 "우리가 여자의 몸으로 규문에 처하여 삼종지도 외에는 간섭할 일이 없사오나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된 도리에서 남녀가 다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취지는 국내 전 여성들의 즉각적인 호응을 받아 서울에서는 2월 28일에 부인감찬회를 비롯하여 대안동 국채보상부인회.부산항좌천리감선의연부인회.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안악군 국채보상탈환회 등 각지에서 취지를 같이하는 28개 여성단체와 17개 준여성단체가 속출하여 의연금을 모집하였다. 특히, 기생 앵무의 1백원 의연은 당시 전국적인 화제가 되었는데 '여자로서 감히 남자보다 한 푼이라도 더 낼 수 없으니 누구든지 몇 천 원을 출연하면 나도 따라하겠소'라고 하여 남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여성들도 남자 못지않은 열과 성의로 적극 참여한 것이다. 남자들의 모금방법이 단연.단주인데 비하여 여성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절미.감찬.패물 등 가까운데서부터 실천하였다. 여성들의 운동 역시 대구.서울.부산 등 경향 각지에서 일어났는데, 이 운동을 제일 먼저 일으킨 여성들은 앞서 본 국채보상기성회가 발기된 그 이튿날인 2월 23일 대구남일동패물폐지 부인회를 결성하고 전국 부녀자들에게 보내는「경고아부인동포」라는 격문은 "우리가 여자의 몸으로 규문에 처하여 삼종지도 외에는 간섭할 일이 없사오나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된 도리에서 남녀가 다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취지는 국내 전 여성들의 즉각적인 호응을 받아 서울에서는 2월 28일에 부인감찬회를 비롯하여 대안동 국채보상부인회.부산항좌천리감선의연부인회.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안악군 국채보상탈환회 등 각지에서 취지를 같이하는 28개 여성단체와 17개 준여성단체가 속출하여 의연금을 모집하였다. 특히, 기생 앵무의 1백원 의연은 당시 전국적인 화제가 되었는데 '여자로서 감히 남자보다 한 푼이라도 더 낼 수 없으니 누구든지 몇 천 원을 출연하면 나도 따라하겠소'라고 하여 남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대구 중구 서야동 1-1 대성사 입구 주차장 국채보상 운동의 발상지 '광문사 터' 기념비를 찾았다.
解脫門(해탈문)
국채보상운동
경제국권수호의 문을 열다!
대구민의소 설치와 군민대회
경상북도의 신교육운동을 이끌어왔던 대구광문사가 선화당(경상북도 관찰부의 관청) 정문 앞의 공공건물에 있던 회관을 1906년 1월 경북의 관찰사 서리가 된 박중양으로부터 회수당하고 쫓겨나게 되었다. 일제가 선화당에 일장기를 내걸고 대구이사청 개청준비에 한창일 때, 달서교로 쫓겨난 대구광문사 문회원들은 대한제국은 있으되 국권이 없는 망국현실을 통탄하면서 대책을 숙의한 결과 이사청에 맞서는 자치단체인 대구민의소를 1906년 8월에 조직하게 되었다. 김광제, 서상돈 등 대구광문회 회원들은 단연국채보상을 주도하는 단체를 대구국채담보회라 칭하고 서문 밖 달서교 부근에 있던 수창사(지금의 대구수창초등학교 부근)에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를 설치했다. 이어 국채보상을 위한 첫 대구군민대회를 1907년 2월 21일 대구성 밖 북후정 아래에서 개최하고, 발의시 작성된 취지서를 낭독하였다. 이날 소노신사와 청홍부녀들과 술파는 아낙과 차 파는 노파, 앉은뱅이 걸인과 백정, 책을 낀 동자와 제기 차는 아이들까지도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의기분발하여 당일 수합한 돈이 수 백 수십 원이나 되었다. 이처럼 열기에 찬 대구군민대회가 열리자 일제의 경상북도 경무부는 '무허가 집회이니 산회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경상북도의 신교육운동을 이끌어왔던 대구광문사가 선화당(경상북도 관찰부의 관청) 정문 앞의 공공건물에 있던 회관을 1906년 1월 경북의 관찰사 서리가 된 박중양으로부터 회수당하고 쫓겨나게 되었다. 일제가 선화당에 일장기를 내걸고 대구이사청 개청준비에 한창일 때, 달서교로 쫓겨난 대구광문사 문회원들은 대한제국은 있으되 국권이 없는 망국현실을 통탄하면서 대책을 숙의한 결과 이사청에 맞서는 자치단체인 대구민의소를 1906년 8월에 조직하게 되었다. 김광제, 서상돈 등 대구광문회 회원들은 단연국채보상을 주도하는 단체를 대구국채담보회라 칭하고 서문 밖 달서교 부근에 있던 수창사(지금의 대구수창초등학교 부근)에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를 설치했다. 이어 국채보상을 위한 첫 대구군민대회를 1907년 2월 21일 대구성 밖 북후정 아래에서 개최하고, 발의시 작성된 취지서를 낭독하였다. 이날 소노신사와 청홍부녀들과 술파는 아낙과 차 파는 노파, 앉은뱅이 걸인과 백정, 책을 낀 동자와 제기 차는 아이들까지도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의기분발하여 당일 수합한 돈이 수 백 수십 원이나 되었다. 이처럼 열기에 찬 대구군민대회가 열리자 일제의 경상북도 경무부는 '무허가 집회이니 산회하라'고 압력을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