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 시비

4

주소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 294-1
탐방로그
대구 중구 달성동 294-1 달성공원 애국지사 이상화 시비를 찾았다.
석주 이상룡 구국기념비, 왕산 허위 선생 순국기념비 탐방을 위해 왔던 곳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삼남의 지사들과 통하여 장래에 대비하였다. 그의 최후 결심은 이에서 더욱 굳어졌다. 과연 적은 병력으로 정부를 눌르고 역적들을 조종하여 우리 황제의 허락도 없이 조약을 맺았다고 주권을 완전박탈하였다. 선생을 일어나게 한 황제의 밀조가 내렸다. 눈물로 황명을 받아 깨어진 금구를 다시 맞추고 기울어진 대하를 다시 고울려고 경기로 나아가 거듭 깃발을 올리매 사방의 의사 모여들었다. 무기도 탄약도 식량도 없고 훈련도 안된 그들에게 적은 너무 억세었다. 선생은 각지의 의장들을 강원도 의장 이인영의 진지 원주에 모아 부서를 새로 간추려 이공을 총대장에 선생을 군사장에 그리고 8도의 대장을 내세워 기일을 정하여 서울로 들어가 적의 통감부를 뒤엎어 일거에 주권을 회복할 책략을 세워 각국 공관에 국제법상 교전단체임을 알리웠다. 그 어찌 뜻하였으랴. 각도 의장들은 기일에 닫지 못하고 이공은 친상을 만나 뒷일을 선생에게 부탁하고 가버려 약정한 그 날 선두에서 지휘하는 그의 친병만이 동대문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천문이랄가 반역자의 밀고와 적의 강습으로
아직도 굽힐줄을 모르고 재거를 도모하던 그의 몸마저 적에게 넘겨졌다. 적진에서의 늠름한 답변에 신문하던 적장도 도리어 그의 구명에 힘쓰도록 되었으며 최후의 그 순간 명복을 빈다는 왜송을 꾸짖어 물리치고 자신의 뒷일에도 불관하는 의기로 옥관을 꾸짖고 오직 「국권을 돌이키지 못하고 어버이 장례도 치루지 못하여 충도 효도 안되니 죽은들 어이 눈감으리」한 유서에 남긴 그 장렬함 국민의 울부짖음 「천일무광」이라 일렀으니 곧 광무 12년, 10월 21일이었다. 생각건대 선생은 초야의 선비로써 국가위급의 즈음 부름을 받았으니 그것이 좀더 일찍었더라면 또 비록 때늦어도 그 때 그 말씀이나마 시행되었더라면 그러나 이로서 그는 그저 일절 만의 선비 아니었음을 가히 알리라. 그리고 고래 우리 민족은 많은 침략에 대결한 민중 항쟁사를 가졌는데 그 때마다 관의병의 구별 없이 거족일치였고 혹 외국원조도 있었지마는 이 때의 우리 의병에게는 안팎으로 비부의자의 성원도 없었을뿐 아니라 도리어 매국노의 사역하는 우리 관군과도 싸우면서 조국에 바친
그 정충이며 또 지방적으로 산간벽지에서 활동하는 게릴라의 범주를 벗어나 중앙지역에서 적의 침략근거를 엎으려던 그 장거며 또 만반산사격인 의병을 조직화 체계화하며 그 힘을 뭉칠려던 그 웅도 가히 일월과 빛을 다툴지니 이 실로 역사의 광휘요 민족의 정화라. 적의 근 병력과 현대적 무기는 능히 한때 그 목숨을 앗았으나 길이 그 정신을 꺾지 못하였다. 선생의 순국 후 그 동지 문생 유족 후인들이 정신을 받아 의병운동에 잇는 광복군운동으로써 국내 국외에서 싸워오기 사천여년 드디어 오늘이 있게 되었다. 지금 갈라진 국토을 부합하여 민족 전체의 자유를 누리게 함도 이 정신에 있을 것이며 자손만대에 이 땅 이 겨레를 지키고 발전시킴도 이 정신에 있을 것이라. 광복 후 이 곳에 기념사업회가 생기고 금년 3.1절 국가에서 건국공로상 중장이 추증되고 개천절에 본도의 후원으로 이 곳에 돌을 세워 선생의 정신을 천양하노니 이 곳은 선생의 본 고장 영남의 중심이오. 이 돌에 새겨진 선생의 정신은 만세에 빛이 되리니 선생의 정신은 곧 민족의 정신이라 삼가 새기노니
여기 우리는 이 겨레를 위하여 그 목숨과 넋을 바친 거룩한 얼을 보았다. 이 얼은 우리의 아득한 옛 한아버지에서 이어받아 끝없는 뒷 자손에게 길이 내리리라.
서기 1962년 10월 3일

풍산 유석우 지음 고령 박병철 글씀
왕산 허위선생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세움
대구 중구 달성동 294-1 달성공원 애국지사 이상화 시비를 찾았다.
尙火詩碑(상화시비)
이상화 시비
이상화(李相和)는 호를(尙火)라 하며 1901년 4월 5일 이시우(李時雨) 선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943년 3월 21일 43세로 세상을 떠난 대구가 낳은 애국 시인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나의 침실로」등이 있으며 이 시는 우리나라 문단 최초로 세워진 시비라는 점에서 한국문학상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尙火詩碑(상화시비)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엮는 꿈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느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歲月(세월) 모르는 나의 寢室(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게로
尙火詩碑(상화시비)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엮는 꿈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느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歲月(세월) 모르는 나의 寢室(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게로

이상화 시비
이상화(李相和)는 호를(尙火)라 하며 1901년 4월 5일 이시우(李時雨) 선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943년 3월 21일 43세로 세상을 떠난 대구가 낳은 애국 시인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나의 침실로」등이 있으며 이 시는 우리나라 문단 최초로 세워진 시비라는 점에서 한국문학상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시인 이상화는 서기 1901년 신축 4월 5일 우남 이시우 공의 제2자로 태여나 서기 1943년 계말 3월 21일 43세로 세상을 떠나니 대구는 그 출생지요 종언지이다. 그의 시력은 「백호」동인시대에 시작되었으니 향기롭고 분방한 그의 시풍은 초기의 조선시단에 있어서 청신한 일매력이었다. 대표작으로는 「나의 침실」을 비롯하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역천」「이별」등이 있으니 비면에 새겨진 시구는 「나의 침실」중의 1절이다.
흘러간 물의 자취를 굳이 찾을 것이 아니로되, 시인의 조찰한 생애를 추념하는 뜻과 아울러 뒤에 남은 자의 허술하고 아쉬운 마음을 스스로 달래자는 생각으로 적은 돌을 새겨 여기 세우기로 한다.
무자 정월 김소운 식
서기 1948년 무자 2월 건립
石州 先生 李相龍 救國紀念碑(석주 선생 이상룡 구국기념비). 오래 전 탐방 시 역광으로 재촬영하였습니다.
石州 先生 李相龍 救國紀念碑
(석주 선생 이상룡 구국기념비)
몸을 풍우 속에 던져 일생을 조국광복에 바치고 뜻과 업적을 남겨 이름을 후세에 드리운 이가 계시니 석주 이상룡 선생이 그이시다. 1858년 11월 24일 경북 안동읍 법흥리에서 나시니 본관은 철성이요 철령군 황의 30대손으로 아버지는 승목 어머니는 안동권씨인데 일찍 퇴계선생의 학통을 이은 서산 김흥락 선생에게서 유학을 배우고 천문 지리 병학에까지 깊은 연구를 쌓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에는 학교를 세워 청년들에게 새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더니 마침내 1910년 조국의 국권이 무너지자 밤낮 이어 통곡하다가 문득 사당에 고별하고 청년들을 격려한 뒤 아우 봉희와 외아들 준병을 데리고 서울의 동지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니 때는 50세 되던 1911년 1월이었다. 그로부터 남만주 회인현을 비롯하여 통화 유하 서란 등지로 옮겨다니며 교포들의 살 길을
마련하기에 애쓰고 또 여러 동지와 함께 신흥학교를 세워 청년교육과 군관양성에 힘을 기울었으며 1919년에는 독립운동의 남만주 총본영으로 군정부를 창설했다가 뒤에 이름을 서로군정서라 고치고 최고책임자인 독판이 되시었다. 그리자 일본군이 만주에 침입하므로 독판의 명령으로 독립군을 출병시켜 청산리 봉오리 갑산리에서 승첩을 거두게하고 또 길림독군과 회담하여 교포의 길림성 거주를 자유롭게하는 외교상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었다. 1925년 58세 때에는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여 정부 안의 사상적 분렬을 조화시키기에 적극 노력하다가 울분이 그대로 병을 이루어 사직하고 도로 서란으로 돌아와 마침내 1932년 5월 12일 75세를 일기로 만리 이역의 외로운 혼이 되시었다. 5년 뒤에는 아우마저 하르빈에서 별세하고 아들은 외로이 고향으로 돌아와 거하다가 이차대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의 세력이 팽창해가므로 조국의 독립을 비관한 끝에 1942년에 단도로써 자결하여 어버이의 뒤를 따랐으며 그 밖에 아우 상동과 종숙 승화 승히 조카 형국 운형 인형들도 일제에 항쟁하다가 혹은 옥고 혹은 옥사하니 세상이 일러 과연 의열의 가문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이제껏 선생 형제를 반장하지 못한 것을 뼈아프게 여기더니 이제 고국 동포들이 힘을 모아 기념비를 세워 선생의 높은 뜻을 길이 받들고자 내게 글을 청하므로 나는 이에 그날의 사적을 대강 적고 다시 옷깃을 가다듬어 노래를 바치노라.
사직이 무너지자 압록강 울며건너 찬 바람 만주벌에 흰 머리 날리시며 한평생 조국광복을 꿈 속에도 비시더니
거기가 어디관대 그 땅에 묻히신고 그 소원 이룬 오늘
님은 정작 안 계시네 혼을랑 돌아오소서 길이 여기 곕소서
서기 1963년 5월 일

후학 이은상 글을 짓고
성산 이기윤은 앞을 쓰고
종 후학 종주는 뒤를 쓰고
경상북도와 대구시는 후원하고
석주 이상룡 선생기념사업회에서 세우다
석주 이상룡 구국기념비
석주(石州) 이상룡(李相龍 1858.11.24~1932.6.15. '62 건국훈장 독립장) 선생은 안동 사람으로 1905년 김동삼, 유인식 등과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부를 조직하고 협동학교(協同學交)를 설립하여 국민계몽운동을 벌였다.
1911년 가족을 이끌고 간도로 망명,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에서 이시영, 이동녕 등과 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하여 교포자녀의 교육과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1912년 경학사를 발전시켜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19년에는 부민단을 모체로 한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였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독판(督瓣)으로 활약하였다. 1922년 8월에는 서로군정서.한족회.대한독립단을 합하여 통군부를 조직하였으며, 이를 다시 대한독립군단 등 8단 9회의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통의부로 발전시켰다.
1925년 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이 되었으나,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에 의한 내분으로 사임하고, 서간도로 내려와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3부 통합운동을 전개하던 중 1932년 6월 만주에서 병으로 순국하였다.
旺山 許蔿 先生 殉國紀念碑(왕산 허위 선생 순국기념비)
왕산 허위 선생 순국기념비
왕산(旺山) 허위(許蔿 1854.4.1~1908.9.27, '62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선생은 경북 선산 출신의 의병장으로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금산과 성주에서 의병 수백명을 일으켜 관병과 교전하여 충북 진천까지 진군했으나 고종황제의 해산명령으로 귀향하였다.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와 함께 군대까지 해산당한 후 고종의 밀명을 받고 경기도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전국의 의병을 통합하여 13도 창의군을 편성, 동대문까지 진격하였으나 결국 패퇴하였다.
이후 허위 의병장은 임진강 일대에서 연합의병부대를 지휘하면서 군율을 정하고 군표를 발행하고 군사를 훈련하고 군기를 제조하는 등 의병활동을 계속하다 19-08년 일본헌병에 체포되어 같은 해 9월 서대문형무소 교수대에 올라 54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왕산 허위 선생 순국기념비
광무제 31년(1894) 왜병이 우리 주권을 무시하고 우리 국토에 올라 천인공노할 포학을 마구하여 왔으되 우리 정부는 황제나 국민의 의사에 어긋난 꼭두각시로 되었다. 국민은 끓어올랐다. 왕산 허위 선생은 떨쳐일어나 잃어진 주권을 돌릴려고 경상도 김산에서 의를 들어 괴뢰관군의 박격에 굽히지 않고 충청도 진천에 이르자 해산의 황명이 내렸다. 이때 적세는 일시 물러서고 적에 붙인 정부도 무너졌으매 그는 완전 복수설치를 못한 한을 머금은채 명에 좆아 돌아섰다. 그 뒤 황제는 선생의 재략을 듣고 불러올렸으나 그가 의정부참찬.비서원승 등 요직에 오를 그때는 이미 늦어 왜병이 또 들어와 러시아병을 쳐넘긴 광무8년(1904).9년의 사이라 선생은 그럼에도 마음을 떨어뜨리지 않고 안으로 국정을 바로잡고 밖으로 외모를 막아낼 길들을 갖추 아뢰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나라의 망함을 깨우치는 눈물의 상소와 왜병의 불법을 외치는 피끓는 격문으로 도리어 붙잡혀 갇히게 되었다. 나랏일의 이미 글렀음을 깨달은 그는 삼도봉 밑에 들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