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룡 구국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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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 294-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몸을 풍우 속에 던져 일생을 조국광복에 바치고 뜻과 업적을 남겨 이름을 후세에 드리운 이가 계시니 석주 이상룡 선생이 그이시다. 1858년 11월 24일 경북 안동읍 법흥리에서 나시니 본관은 철성이요 철령군 황의 30대손으로 아버지는 승목 어머니는 안동권씨인데 일찍 퇴계선생의 학통을 이은 서산 김흥락 선생에게서 유학을 배우고 천문 지리 병학에까지 깊은 연구를 쌓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에는 학교를 세워 청년들에게 새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더니 마침내 1910년 조국의 국권이 무너지자 밤낮 이어 통곡하다가 문득 사당에 고별하고 청년들을 격려한 뒤 아우 봉희와 외아들 준병을 데리고 서울의 동지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니 때는 50세 되던 1911년 1월이었다. 그로부터 남만주 회인현을 비롯하여 통화 유하 서란 등지로 옮겨다니며 교포들의 살 길을
마련하기에 애쓰고 또 여러 동지와 함께 신흥학교를 세워 청년교육과 군관양성에 힘을 기울었으며 1919년에는 독립운동의 남만주 총본영으로 군정부를 창설했다가 뒤에 이름을 서로군정서라 고치고 최고책임자인 독판이 되시었다. 그리자 일본군이 만주에 침입하므로 독판의 명령으로 독립군을 출병시켜 청산리 봉오리 갑산리에서 승첩을 거두게하고 또 길림독군과 회담하여 교포의 길림성 거주를 자유롭게하는 외교상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었다. 1925년 58세 때에는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여 정부 안의 사상적 분렬을 조화시키기에 적극 노력하다가 울분이 그대로 병을 이루어 사직하고 도로 서란으로 돌아와 마침내 1932년 5월 12일 75세를 일기로 만리 이역의 외로운 혼이 되시었다. 5년 뒤에는 아우마저 하르빈에서 별세하고 아들은 외로이 고향으로 돌아와 거하다가 이차대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의 세력이 팽창해가므로 조국의 독립을 비관한 끝에 1942년에 단도로써 자결하여 어버이의 뒤를 따랐으며 그 밖에 아우 상동과 종숙 승화 승히 조카 형국 운형 인형들도 일제에 항쟁하다가 혹은 옥고 혹은 옥사하니 세상이 일러 과연 의열의 가문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이제껏 선생 형제를 반장하지 못한 것을 뼈아프게 여기더니 이제 고국 동포들이 힘을 모아 기념비를 세워 선생의 높은 뜻을 길이 받들고자 내게 글을 청하므로 나는 이에 그날의 사적을 대강 적고 다시 옷깃을 가다듬어 노래를 바치노라.
사직이 무너지자 압록강 울며건너 찬 바람 만주벌에 흰 머리 날리시며 한평생 조국광복을 꿈 속에도 비시더니
거기가 어디관대 그 땅에 묻히신고 그 소원 이룬 오늘
님은 정작 안 계시네 혼을랑 돌아오소서 길이 여기 곕소서
서기 1963년 5월 일

후학 이은상 글을 짓고
성산 이기윤은 앞을 쓰고
종 후학 종주는 뒤를 쓰고
경상북도와 대구시는 후원하고
석주 이상룡 선생기념사업회에서 세우다
達城徐氏 遺墟碑(달성서씨 유허비)
石齋 徐丙五 先生 藝術碑(석재 서병오 선생 예술비)
竹農 徐東均 先生 藝術碑(죽농 서동균 선생 예술비)
石州 李相龍 救國紀念碑(석주 이상룡 구국기념비)
이상룡(1858~1932)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이며,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을 역임하였다.그는 1911년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여 부민단(扶民團) 단장,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정의부(正義府) 등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여 무력투쟁을 계속하였다. 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으로 취임하기도 하였으며, 만주에서 계속 활약하다가 1932년 6월 15일 이역에서 병사하였다.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석주 이상룡 구국기념비
석주(石州) 이상룡(李相龍 1858.11.24~1932.6.15. '62 건국훈장 독립장) 선생은 안동 사람으로 1905년 김동삼, 유인식 등과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부를 조직하고 협동학교(協同學交)를 설립하여 국민계몽운동을 벌였다.
1911년 가족을 이끌고 간도로 망명,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에서 이시영, 이동녕 등과 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하여 교포자녀의 교육과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1912년 경학사를 발전시켜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19년에는 부민단을 모체로 한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였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독판(督瓣)으로 활약하였다. 1922년 8월에는 서로군정서.한족회.대한독립단을 합하여 통군부를 조직하였으며, 이를 다시 대한독립군단 등 8단 9회의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통의부로 발전시켰다.
1925년 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이 되었으나,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에 의한 내분으로 사임하고, 서간도로 내려와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3부 통합운동을 전개하던 중 1932년 6월 만주에서 병으로 순국하였다.
石州 李相龍 救國紀念碑(석주 이상룡 구국기념비)

이상룡(1858~1932)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이며,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을 역임하였다.그는 1911년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여 부민단(扶民團) 단장,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정의부(正義府) 등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여 무력투쟁을 계속하였다. 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으로 취임하기도 하였으며, 만주에서 계속 활약하다가 1932년 6월 15일 이역에서 병사하였다.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석주(石州) 이상룡(李相龍 1858.11.24~1932.6.15. '62 건국훈장 독립장) 선생은 안동 사람으로 1905년 김동삼, 유인식 등과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부를 조직하고 협동학교(協同學交)를 설립하여 국민계몽운동을 벌였다.
1911년 가족을 이끌고 간도로 망명,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에서 이시영, 이동녕 등과 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하여 교포자녀의 교육과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1912년 경학사를 발전시켜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19년에는 부민단을 모체로 한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였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독판(督瓣)으로 활약하였다. 1922년 8월에는 서로군정서.한족회.대한독립단을 합하여 통군부를 조직하였으며, 이를 다시 대한독립군단 등 8단 9회의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통의부로 발전시켰다.
1925년 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이 되었으나,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에 의한 내분으로 사임하고, 서간도로 내려와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3부 통합운동을 전개하던 중 1932년 6월 만주에서 병으로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