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돈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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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87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2010 대구의 아름다운 거리 – 근대문화골목
이 거리는 선교사주택~3.1만세 운동길~계산성당~이상화·서상돈 고택~성밖골목으로 이어지며, 도심 속에서 개화기 근대문화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골목 곳곳에는 선현들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이 깃들어 있으며 옛 정취와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어, 우리시에서는 아름다운 거리로 지정하여 그 품격을 지키고자 한다

근대路(로)의 여행
→ 60m / 이상화 고택(李相和 古宅), 서상돈 고택(徐相敦 古宅), 근대문화체험관 계산예가
→ 270m / 3.1운동길(3.1運動路)
국채보상운동의 거장 서상돈 고택
국채보상운동은 일제로부터 국권을 찾고자 나랏빚을 갚자는 모금활동으로 대구를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본 고택은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에 섰던 서상돈의 삶의 터전으로 한국 근대문화를 담고 있는 유서깊은 곳입니다.
徐相敦(서상돈) 1850~1913 서상돈 조선 고종때의 민족운동가

서상돈은 1850년 10월 경북 김천시 지좌동에서 출생하였으며 1866년 병인사옥 당시 천주교신자 박해를 피해 대구로 피난하여 왔다고 전해진다.
서상돈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대구 천주교인의 도움으로 보부상을 시작하여 대구제일의 거상이 되었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친척들의 고난과 순교를 목격한 뒤부터 천주교의 전교활동과 구제·자선활동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일생동안 천주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하였다.
1894년에서 1903년까지 정삼품 통정대부, 탁지부 세무시찰관으로 경상도의 세정을 총괄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 부설 만민공동회 재무부장으로 활동하면서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민권보장 및 참정권 획득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서상돈은 교육사업을 지원하고 그 운영을 도왔다. 1899년 계산동성당 부속건물에 한문서당인 해성제)를 설립을 지원하였으며, 1908년에는 이 해성제를 성립학교로 바꾸어 개교하였다. 1905년 달서여학교를 설립을 적극 지원했으며 1906년에는 교과서, 계몽잡지, 신문, 교양서적 등을 발간하기 위한 대구광문사를 조직하였다.
1907년 대구광문사에서 그 명칭을 대동광문회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를 마친뒤 광문사 부사장으로서 담배를 끊어 당시의 국채 1300만원을 보상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고종황제를 비롯하여 신분을 초월한 전국의 모든 남녀노소들이 참여하는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으나 일제의 방해로 결실을 맺지 못하고 끝났고 이 운동을 제안한 서상돈은 1913년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63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국채 1,300만원 보상취지문

"국채 1,300만원 보상취지(요약)"
무릇 신민이 (충)으로 행하고 義(의)를 숭상하면 나라는 흥하고 백성은 평안을 누리며, 不忠(불충하고不義(불의)하면 나라는 망하고 백성의 멸함은 고금의 역사에 근거함이라....
지난날 일본이 청일러일 전쟁을 치를 때 소국이 대국을 이긴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병사와 결사대가 있어 피바람의 전쟁터를 흡사에 나아가듯 하였기 때문이다. 후방의 국민들은 짚신을 삼아 팔고 죽을 먹으면서 여자들은 반지를 팔아 마련하였음이라..
아, 우리 이천만 동포는 국가가 이처럼 위난인데도 결심하는 이 없고 방도를 기획하는 일 한가지 없으니 나라가 망해도 괜찮단 말씀인지. 우리의 국채 1,300만원은 대한의 (존망)이 달린 일이라 할지니.. 우리가 어찌 월남 등 멸망한 민족의 꼴을 면할 수 있으리오. 이천만 동포가 석달만 담배를 끊어 한사람이 한달에 20전씩만 대금을 모은다면 거의 1,300 만원이 될 것이니 국민들의 당연한 의무로 여겨서 잠시만 결심하면 갚을 수 있는 일이라..
아, 우리 이천만 가운데 애국사상이 조금만이라도 있는 이가 있다면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 우리가 감히 이를 발기하고 취지문을 부치면서 피눈물로 복원하노니, 대한의 신민 첨자는 말로 혹은 글로 서로 전하고 알려 모르는 이가 한사람도 없게하여 기필코 실시함으로써 위로는明에 보답하고 아래로 우리 강토를 보존하기를 천만행심이로다.
대구 중구 계산동2가 서상돈 선생의 고택과 이상화 선생의 고택을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