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못 상화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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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대구광역시 수성구 두산동 499-4
탐방로그
대구 수성구 두산동 499-4 수성못 상화동산을 찾았지만, 차를 세울 곳을 찾지 못해서 돌고 있다.

보훈처 공훈록에는 '이상화' 애국지사가 두 분이 계신다.
이상화(李相和)는 문화운동으로, 이상화(李祥和)는 3.1운동으로 서훈되신 분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김동인 주요한 최남선 박태원 현진건 박종화 박영희 백기만 이장희 이태준 홍사용 정지용
나도향 김영랑 정지용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윤동주
상화와 그의 친구들 - 이장희(1900~1929)
현진건, 백기만과 더불어 대구 출신 문인으로 이상화의 벗이다. 젊은 시절, 부친으로부터 조서총독부 관리로 일할 것을 강요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집을 나와 궁핍하고 고독한 삶을 살았다. 1929년 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하기까지 40여편의 작품을 남겼는데, 섬세한 감각과 시각적인 이미지를 작품에 담아낸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봄은 고양이로다≫ ≪하일소경≫등이 있다.
상화와 그의 친구들 - 홍사용(1900~1947)
휘문의숙을 졸업한 홍사용은 이상화와 함께 ≪백조≫동인으로 활동했다. 향토적이며 감사억인 서정ㅅ를 주로 선보였는데, 비애의 눈문과 허망함을 형상화한 사실적인 장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민요 율조를 바탕으로 한 민요시도 다수가 있다. 대표작으로는 ≪나는 왕이로소이다≫ ≪그것은 모두 꿈이었지마는≫ ≪봄은 가더이다≫ ≪해저문 나라에서≫ 등이 있다.
상화와 그의 친구들 - 백기만(1902~1967)
이상화의 오랜 벗인 백기만은 대구 출신으로 3.1운동 당시 이상화와 손잡고 대구 독립만세 운동을 계획하기도 했다. 상화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이상화와 이장희의 시를 정리한 ≪상화와 고월≫을 간행했으며, 대구 달성공원의 상화시비 건립을 앞장서기도 했다. 1926년 이후에는 문학평론가로도 활동하였으며, 주요작품으로는 ≪꿈의 예찬≫ ≪청개구리≫등이 있다.
상화와 그의 친구들 - 나도향(1902~1926)
이상화와 함께 ≪백조≫ 동인으로 참여한 나도향은 창간호에 ≪젊은이의 시절≫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벙어리 삼룡≫ ≪물레방아≫ 등의 작품을 남겼는데, 초기에는 낭만주의적 경향을 보이다가 점점 이를 극복하고 사실주의적인 작품을 발표했다. 특히 당대 농촌의 현실과 풍속을 예리하게 묘사한 그의 작품들은 1920년대 한국 소설의 한 전형으로 손꼽힌다.
상화와 그의 친구들 - 현진건(1900~1943)
현진건은 대구 출신으로 이상화와 둘도 없는 벗이었다. 1917년 이상화, 백기만과 함께 습작들을 모아 동인지 ≪거화≫를 발간,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이후≪백조≫ 동인으로 활발하게 참여했으며 시대일보, 동아일보 등의 기자로도 일했다. 동아일보를 사직하고 1937년부터는 소설 창작에만 전념했는데, 체험소설부터 현실고발소설, 역사소설까지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다. 그리고 기묘하게도 그는 1943년 4월 25일 절친한 벗 이상화와 같은 해, 같은 날에 세상을 떠났다. 대표작으로는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등이 있다.
상화와 그의 친구들 - 박종화(1901~1981)
낭만주의 작가로 알려진 박종화는 이상화와 함께 ≪백조≫ 동인으로 활동했다. 서울 출신으로 ≪장미촌≫ 창간호에 ≪오뇌의 청춘≫ ≪우유빛 거리≫등을 발표하며 문학적인 활동을 시작했으며, ≪아리랑 정조≫ ≪전야≫ 등 역사소설 작가로도 이름을 알렸다. 특히 그는 '민족과 역사를 떠난 문학은 존재할 수 없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상화 그리고 민족애 - 우리 시대 청년에게 묻는다, 빼앗긴 들에 봄은 왔는가
민족시인 이상화(1901~1943)
시인 이상화는 일제강점기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 등을 발표해 민족혼을 일깨웠다.
그의 숭고한 생애와 문학을 기리며, 애국애족 정신을 이어받고 드높이기 위해 이 흉상을 세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민족시인 이상화〈1901~1943〉
민족시인 이상화〈1901~1943〉
민족시인 이상화(1901~1943)
시인 이상화는 일제강점기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등을 발표해 민족혼을 일깨웠다.
그의 숭고한 생애와 문학을 기리며, 애국애족 정신을 이어받고 드높이기 위해 이 흉상을 세운다.
2017년 9월 23일 대구광역시 수성구청장
증 대구수성청년회의소(2009)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대에 준열하게 민족혼 불 지피기로 우리 민족의 저항정신과 애국심을 드폰였던 이상화는 대구가 낳은 자랑스러운 민족시인이다.
1901년 대구 서문로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 중앙학교를 수료했으며, 3.1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조국 광복을 두 해 앞둔 1943년, 그토록 염원했던 광복을 보지 못 한 채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1922년 현진건, 박종화 등과 함께 '백조' 동인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한 그는 향토색 짙고 주옥같은 작품들을 발표, 민족문학의 횃불을 높이 들었다.
광복 60주년과 수성구청 개청 25주년이 되는 해을 맞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원문 시비를 여기 세운다. 그가 바라보며 시상을 떠올렸다는 수성들판이 주택가로 바뀌었으나 그런 뜻이 담긴 이곳에 나라사랑 정신을 일깨우는 새 터전이 되기를 기원한다.
2005.12.31 수성구청장 김규택 '빼앗긴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비건립자문위원회
대구 수성구 두산동 499-4 수성못 상화동산을 찾았지만, 차를 세울 곳을 찾지 못해서 돌고 있다.
보훈처 공훈록에는 '이상화' 애국지사가 두 분이 계신다.
이상화(李相和)는 문화운동으로, 이상화(李祥和)는 3.1운동으로 서훈되신 분이다.
수서못 상화동산 시문학거리

수성못과 수성들은 민족시인 이상화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적 상상의 모태가 된 곳입니다.
1901년 4월 5일 대구 중구에서 태어나 1943년 4월 25일 마흔셋으로 생을 마감한 상화.
그는 1926년 스물여섯 청년 시절에 민족의 현실을 '빼앗긴 들'에 담아 노래했습니다.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어 수성들을 거닐며 온 몸으로 시대의 아픔과 희망을 노래한 이상화.
수성구는 2015년 이곳에 상화동산과 시문학거리를 만들어 가장 빛나는 청춘의 이름. 상화와 함께 하고자 합니다.
仁者壽城(인자수성)
청년, 상화를 만나러 가는 길
수성못 시문학거리
뜨거운 민족애로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시인 이상화(1901~1943).
그의 문학은 만개한 1920년대 한국 근대문학의 표상이기도 하다.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표현하며 청년의 열정을 불태웠던 이상화.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이 곳 수성못에서 우리 시대 뜨거운 청년, 상화를 그려 본다.
이별(離別)을 하느니 - 이상화
나의 침실로 - 이상화
상화 그리고 사랑 - 청년 상화, 사랑을 넘어 사랑을 쓰다
상화 그리고 사랑
청년 상화, 사랑을 넘어 사랑을 쓰다
1920년대, 한국문학에서 '청춘' 혹은 '청년'이란 말은 개인의 감각과 감정을 공식화하는 가장 뜨거운 단어였다. 당대 대중들은 청년이란 칭호를 통해 기존의 형식과 영역을 벗어난 새로운 세상의 주인공을 만나고 싶었다. 말 그대로 식민지 시대를 미끄러지듯이 탈주하는 새로운 존재, 청년의 탄생을 모두 염원하고 있었다.
이상화는 시대를 청년으로 살았다. 식민지는 청년에게 말세의 절망과 비애, 자조와 데카당의 정조로 다가왔다. 이상화의 초기 시는 그 정조의 일단이다. 3.1운동 이후 절마억 분위기와 개인의 우울은 퇴폐와 몽환적 이미지로 형상화되곤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발견한 관능미는 청년 이상화 문학의 또 다른 출발이다. 시 <나의 침실로>가 열애의 흔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시는 개인의 열정과 시대가 결합하는 상상의 지점에서 형성된다. 1923년 시인이 일본 관동에서 목격한 학살과 죽음은 스스로를 해체시켜버릴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 파국을 벗어나는 길 위에서 시인은 사랑을 만난다. 그리고 스스로를 치유한다. 청년 이상화에게 사랑은 또 다른 시대의 절규이면서 치유였던 것이다. <나의 침실로>는 바로 그 결과였다.
흥미로운 것은 시 <나의 침실로>에 등장하는 '앞산'의 이미지이며 '목거지'와 같은 대구 말이다. 그것은 시인의 사랑과 열정 속에 대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청년 이상화는 그의 사랑과 시 속에서 대구의 이미지를 본능적으로 육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글. 박승화(영남대 국어국문학교 교수)
상화 그리고 백조 - 청년의 열정 ≪백조≫ 동인으로 탄생하다
열정의 한국 근대문학 동인 그들의 발자취
상화 그리고 백조
청년의 열정, ≪백조≫ 동인으로 탄생하다
1921년 방황과 번민의 청년이었던 이상화는 어느 날 소설가 현진건의 서울 집을 찾는다. 그리고 그 곳에서 박영희, 나도향, 홍사용, 박종화 등 시대의 문인들을 만난다.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낭만주의 문학의 정점이었던 ≪백조≫동인의 시작은 곧 이상화 문학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흔히 동인지 시대라 불리는 1920년대 한국 근대문학의 꼭지점에 ≪백조≫가 있었으며 그 푯대 끝에 깃발처럼 청년 시인 이상화가 나부끼고 있었다.
≪백조≫ 문학의 핵심은 청년의 열정과 시대 감각이었다. 청년의 감각, 이것이야말로 당대 문학의 핵심이었으며, 나아가 초기 한국 근대문학의 내적 동력이었다. 청년 이상화의 문학적 실체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낭만주의 사조의 선구적 수용과 빼앗긴 시대에 대한 청년의 갈증이 문학적 형상을 통해 실현되고 있었다.
언어와 문학 이전에 나라 잃은 삶이 있었으며, 시대를 앞서가는 감각과 호흡을 지닌 대구 청년이 있었다. 식민지 시대를 청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식민지를 넘어서는 상상력과 감각, 그리고 청년으로서의 실천이 요구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식미지 시대가 청년에게 던져준 과제였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는 일은 야만이다.'는 아도르노의 위대한 절규는 다시 말해 아우슈비츠를 넘어서는 시를 의미한다. 청년 이상화에게도 식민지는 넘어서야 할 과제였다. 그것은 곧 청년의 열정과 상상력으로 식민지를 균열시키고 넘어서는 또 하나의 저항이었다.
글. 박승희(영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수성못 시문학거리에서 만난 한국 근대문학의 주역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