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 산27-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향년 76세로 입천하셨다. 기독교 신앙 가운데 침례도 받으시고 하나님 품에 안기셨다. 1990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장하였다.
1999년 4월 일
1999년 4월 일
愛國志士 張彦祚 先生之墓(애국지사 장언조 선생의 묘)
장언조(張彦祚) 1924-1998 / 묘역번호 : 7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1990년)
.운동계열 : 광복군, 대구
.안장일시 : 1998년 10월 1일
1943년 일군군에 강제징집. 1944년 일본군에서 탈출. 1945년 중국 중경의 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에서 특수임무수행한 광복군 요원. 1990년 건국훈장 에족장 수여.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1990년)
.운동계열 : 광복군, 대구
.안장일시 : 1998년 10월 1일
1943년 일군군에 강제징집. 1944년 일본군에서 탈출. 1945년 중국 중경의 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에서 특수임무수행한 광복군 요원. 1990년 건국훈장 에족장 수여.
애국지사 장언조 선생은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의 일원으로서 조국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독립투사의 한 분이다. 선생은 1924년 9월 17일 인동 장공의 장남으로 대구시 동부 지역인 신천동에서 출생하였고 동인동에 위치한 진광학원에 다니다 4학년때 민족사상을 지니셨던 김진구 선생의 영향을 받게 되어 일본경찰에 의해 강제 퇴학을 당하게 되었고 고향을 떠나 함경북도 청진으로 가서 2년 여를 살다가 귀향했다. 그리하여 나라를 알게 되었고 어린 가슴에 왜구들에 대한 증오심이 싹트게 되었다. 선생은 일제의 식민지 정책 하에서 남달리 망국의 한을 달래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차 20세 되던 1944년 가을 일제가 실시한 징병제에 의해 일본군에 강제 입대하게 되었다. 1944년 말부터 1945년 초에 일본 황국은 중국의 전시 수도였던 중경 공략을 목표로 사실상 중일전쟁의 판가름이 될 지강대회전을 위해 호남성 장사 형산 형양을 중심으로 중국 방면 군의 대병력을 집결 중이었다. 선생은 중국의 북부 및 중부지방에서 수개월에 걸친 소정의 군사교육을 마치고 이 대회전을 위해 집결 중인 일본군에 배속되었다. 이상과 같은 상황하에서 선생은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한 목숨 바쳐 싸우겠다는 일념으로 망명의 뜻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서 1944년 12월 중국 호남성 호담지구에서 미리 공작한 강대열 정대윤 동지 등과 함께 많은 고난을 겪은 후 구사일생으로 일군을 탈출하여 중국군에 망명했다. 이것은 용기와 결단력이 없이는 감행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후 선생 일행은 1945년 2월 중경에 있던 우리 임시정부를 찾아가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재중경 우리 교민에 대한 생명 자산의 보호와 민사업무를 담당하였으며 장차 우리 국군의 기간 요원을 목표로 한 교육 훈련과 한중 친선을 위한 정훈 활동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광복 후 1951년 9월부터 경찰에 복무하다가 1960년 3월 대구중부경찰서에서 퇴직하였다. 그후 가사를 돌보시고 4남매를 대학 졸업 출가시키셨으며 광복회 이사로도 봉사하셨으나 말년에 중병을 얻어 1998년 9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