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 산27-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이 나라 이 겨레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몸과 마음 다 바쳐 포악한 일제와 싸우셨다. 훌륭하신 교육정신은 겨레의 스승이 되셨고, 조국통일에 대한 가르침은 찬란한 빛이 되셨다. 선생의 교훈은 후예들 가슴에 새겨져 영원하리라.
2007년 10월 18일 광복회원 고령 신성구 삼가 지어 쓰고 광복회 대구.경북연합지부 삼가 세우다.
2007년 10월 18일 광복회원 고령 신성구 삼가 지어 쓰고 광복회 대구.경북연합지부 삼가 세우다.
愛國志士 豪圃 玄泳晩 先生之墓 (애국지사 호포 현영만 선생의 묘)
현영만(玄泳晩) 1921-1981 / 묘역번호 : 51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 (1977년)
.운동계열 : 국내항일, 경북 경산
1936년 15세에 일본 오사카에 유학, 항일운동 전개, 왜경에 체포 옥고를 치름. 1940년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항일결사 "무우원" 조직으로 민족의식 고양함. 진량초등학교 근무 중 항일운동 활동 발각으로 체포, 1943년 대구형무소 징역 3년 옥고 치르던 중 광복으로 출소, 1980~1984년 제9대 광복회 대구 경북 연합 지부장 역임.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 (1977년)
.운동계열 : 국내항일, 경북 경산
1936년 15세에 일본 오사카에 유학, 항일운동 전개, 왜경에 체포 옥고를 치름. 1940년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항일결사 "무우원" 조직으로 민족의식 고양함. 진량초등학교 근무 중 항일운동 활동 발각으로 체포, 1943년 대구형무소 징역 3년 옥고 치르던 중 광복으로 출소, 1980~1984년 제9대 광복회 대구 경북 연합 지부장 역임.
여기 조국의 주권 회복과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신명을 바치신 지도자이시며, 일선 교육의 훌륭한 스승 한 분이 잠들어 계시니 이 분이 바로 애국지사 호포 현영만 선생이시다. 선생은 연주현씨이며, 시조인 담윤공의 시호는 경헌이다. 고려 의종 때 대장군을 역임하고, 명종 때 조위총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문하 시랑평장사가 되고 연안군으로 봉해졌다. 중시조인 평장사 태노공의 27세손 한학자 복규공과 김해 허씨 사이에 1921년(신유) 5월 2일 경상북 경산시 하양읍 도리동 97번지에서 출생하셨는데 풍모가 준수하고 총명과단하며 품성은 강직하고 정의감이 강하셨고 지략이 있었다. 선생은 1936년 15세때 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대판으로 유학하셨는데 조선인에 대한 왜인들의 극심한 차별대우에 분개하셨다. 선생은 조선인 유학생을 동지로 결합하여 항
일운동 단체인 비밀결사에 가담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던 중 왜경에게 피체되어 옥고를 치루셨다. 귀국하여 대구 사범학교에 입학하셨는데, 일제의 식민지 교육 정책은, 가난한 수재급 학생들을 모집하여 관비로 철저한 황민화교육을 시켜서 일선학교에 배치하여 황민화 교육을 전담시킴이 사범학교의 특성이었다. 정의감이 강한 선생은 비밀결사 무하원을 조직하여 기관지 무하원을 발간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본격적인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사범학교의 독립운동은 역사적으로 대구 사범학교만이 독립운동을 하였다. 1941년에 졸업하여, 경산시 진량국민학교에 교사로 봉직하면서, 동지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는데, 비밀결사의 활동이 왜경에게 탐지되어 1943년 6월에 체포되셨다. 선생은 일제의 혹독한 고문과 회유를 물리치고 부정으로 일관하였으나 3년형의 옥고를 치르면서, 옥중 투쟁을 하던 중, 8.15의 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셨다. 선생은 교육계로 되돌아 와서, 1949년에 약관 29세로 경산시 안심국민학교의 교장에 취임함을 필두로, 여려 학교에서 교장직을 역임하여, 훌륭한 국민교육의 공로가 인정되어 대통령 표창을 받았으며, 1980년, 광복회 대구 경북 연합지부 제9대 지부장에 취임하셔서 광복회의 위상을 높이고, 회원들의 복지 향상에 노력하였으며, 조국 통일을 위한 강연을 많이 하셨다. 선생은 두 차레에 걸처서 옥고를 겪으면서, 일제의 가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득병하여, 1981년 4월 6일 새벽 4시에 향년 61세를 일기로 영면하셨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부인 김해 허봉선 여사는 부덕이 있고, 슬하에 4남 3녀를 두셨는데, 장남 동환은 남양 홍순호와, 차남 승환은 경주 김윤수와 결혼했으며, 3남은 상환, 4남은 창걸이다. 장녀는 영임이며, 차녀 경임은 진주 정상민에게, 3녀 경환은 수원 백경에게 출가했다. 손자에 영민 영진 성호가 있다. 칠곡 지천면에서 이곳 선열공원으로 모시고, 선생을 기리고 존경하며 삼가 비명 한 장 지어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