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희 묘

4

주소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 산27-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젊은 시절 조국을 짊어졌고 광복된 조국에는 통일을 열원했네 애국애족의 공적을 이 돌에 새기니 길이 빗나리라.
2001년 4월 일 족손 석기 삼가짓다
愛國志士 石巖 金公 之墓(애국지사 석암 김두희의 묘)
김두희(金斗熙) 1921-2000 / 묘역번호 : 5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운동계열 : 일본 방면, 경북 성주
.안장일시 : 2001년 4월 일
1939년 일본경도 입명관중학교 재학중(야간부) 중근타이루 회사에 근무하면서 비밀결사 민족부흥회 조직, 경도책임자로 활동 중 체포 후 석방됨. 그 후 1940년 다시 체포되어 명고옥지방재판소에 기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받다.
신암선열공원에는 애국 선열 의성 김공이고 이 계신 유택이 있다. 공의 휘는 두환이요 초명은 두희며 자는 인석이요 석암은 그의 호이다. 고의 휘는 추영이요 비는 김해 김씨 탁영의 후영성의 따님이다. 경신 1920년 10월 4일 성주 윤동 고제에서 태어나니 미목이 수려하고 재기가 총명하여 조부 세응의 귀여움을 받으며 정훈을 익혔다. 1936년 신학에 뜻을 두어 용약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갔다. 일본 경 도립 명관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한민족에 대한 차별과 멸시로 의분을 참을 길이 없는 반면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조국독립에 대한 염원은 활화산처럼 불탔다. 1938년 18세의 나이에 국가 없는 민족이 공부해서 무
엇하나 공부보다는 나라를 되찾는 일이 선결 과제임을 결론 짓고 독립운동을 할 것을 스스로 굳게 다짐하고 그해 하휴를 이용 7월에 명고옥에 갔다. 그 곳에서 진주 출신 유학생 이수영을 만나 뜻을 같이 할 것을 맹세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민족 복흥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이수영 부회장에 공이 피선되었으며 민족사상을 고취시키고 일본의 중요 공장 파괴 및 요인 암살 등으로 일본 사회를 혼란시켜 독립을 쟁취하는데 목적을 두었으며 왜경에 발견되었을 때에는 자결을 원칙으로 하며 뜻을 이루지 못할 경우에는 묵비로 사수할 것을 행동강령으로 의결하였다. 공은 부회장 겸 경도총책을 맡아 경도 조선 유학생들을 극비리에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뜻을 같이 할 것을 호소한 결과 박훈조 외 36명의 동지를 얻었다. 1939년 8월 회장 이수영 하숙집에서 극비리에 폭탄 제작에 착수하는 한편 민족 복흥회를 평화회라 개칭하고 외적으로는 조선인의 문맹퇴치와 개몽운동으로 독립운동을 가장하하였다. 1940년 4월 명고옥에 있는 거대한 공장을 폭파할 계획을 추진 중 5월에 築口曾根田 타이루 공장에서 동지가 운동 중 비밀이 누설되어 회장을 비롯하여 20여 명이 체포되었고 공도 경도학교에서 검거되어 명고옥 검찰로 이송되었다. 이송 도중 자결할 기회를 틈탔으나 왜경 2명이 특별감시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호송 열차에서 눈을 감고 회상하니 목적한 조국독립은 보지 못한 채 20세의 청춘이 초로 같이 사라지다니 이 나라 이 민족을 어찌하고 눈을 감을고 원통하고 한스럽도다. 3개월의 모진 고문 끝에 반신불수의 몸이 되어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의 형을 받았다. 독립된 조국 정부에서 독립유공이 인정되어 1986년 12월 대통령 표창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했다. 2000년 2월 대구 파티마 병원에서 향년 80에 고요히 영면하였다. 피끓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