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련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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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 산27-1
탐방로그
이곳에 같이 있는 애국지사 김용해 선생과는 부자지간이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이다. 공은 동지들과 바로 대구 큰장날인 3월 8일을 기하여 서남시장의 수천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그 자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치자 드디어 대구시민들이 이에 합세하여 일제히 봉기함으로써 독립의 함성은 대구고을을 뒤흔들었고 의거의 대열은 대구의 거리를 뒤덮었다. 시외행렬이 동성로 3가에 이르자 멀리 포진하고 있던 일본군경들은 의거대중을 향해 무자비한 총검을 휘두르니 이때 공과 그 아들 용해가 저들의 만행에 찌기고 쓰러져 끝내 그 아들용해는 숨을 거두고 말았으며 공은 투옥되어 2년6개월의 갖은 고초를 당하게 되었다. 공은 출옥하자 징역노임으로 순국한 아들의 무덤앞에 순의비를 세웠으니 그날의 통한을 어찌 다 필설로 감당하리오. 그 후 전도사가 된 공은 다시 뜻을 품고 도일하여 교포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면서 우리의 어문배척정책에 투구하였으나 문초끝에 강제추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귀국하여서는 달성구지에 교회를 세워 시무하던중에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유로 또 구금되는 등 그의 항일투쟁은 추호도 굽일 줄을 몰랐다. 그러너 공은 그렇게도 그리던 조국광복을 보지못하고 1941년 7월 19일 65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니 너무도 애통하도다. 배는 김갑만여사요 녀는 명조로 여규진에 출가하였다. 1955년 7월 12일 공의 유해는 대구 선열묘지에 봉장하고 1986년 3.1절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86년 가을 국비영달로 이 비를 세움에 있어 공의 뒤를 이어 제단을
받드는 대구 남산교회 신도들이 공의 행적에 감복되어 몇자 새기노니
밀알이 비록 땅에 떨어져 썩었지만 그의 결실은 독립과 번영으로 영원하리로다.
愛國志士 金兌鍊 長老 之墓(애국지사 김태련 장로의 묘)
이곳에 같이 있는 애국지사 김용해 선생과는 부자지간이시다.
김태련(金兌鍊) 1879-1943 / 묘역번호 : 46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운동계열 : 3.1운동, 대구
.안장일시 : 1955년 7월 12일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장날 독립만세운동 주동, 기독교 신도 규합과 계성중.고등보통학교.신명여학교.학생연합시위 제휴하고 태극기 제작 준비 격문 살포로 1천여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낭독으로 체포. 징역 2년 9월의 옥고를 치름.
長老 慶州 金公 兌鍊(장로 경주 김공 태련)
애국지사 김태련 장로는 경주인이요 1877년 1월 15일 대구 남산동 537번지에서 태어나 어린시절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던중 조실부모하여 자자단신이 되었다. 그러한 고독과 역경속에서 공은 기독교에의 입교를 결심하게 되었고 드디어 1917년 대구남산교회 장로로 장립되기에 이르니 공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다시 만학의 포부를 품고 평양 신학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그 후 대구로 돌아와 제일교회 조사로 시무하던중 1919년 3.1운동 맞게되자 공은 민족의 독립쟁취를 위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대구의 의거를 주도하고 나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