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광명시 일직동 산26-7
- 탐방로그
- 애국지사 황찬영 선생의 묘소를 찾으러 광명시 일직동 산26-7에 왔다. 사적을 찾아가는 길에서 무의공 이순신 장군의 묘소에 대한 안내판을 여러 개 발견했다. 장군님 묘소를 왼쪽에 두고 계속 올라가다보면 애국지사 황찬영의 묘소를 발견할 수 있다. 해당 묘소는 봉분이 없는데 제5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됐기 때문이다. 현재는 구 묘비만이 남아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산으로 들어가자 등산로가 양쪽으로 갈린다.
무의공 이순신 장군의 묘소 안내판이 계속 나온다.
무의공 이순신 장군 묘를 왼쪽에 두고 계속 올라간다.
무의공 이순신 장군 묘에서 산 위쪽으로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가 위성지도를 보며 왼쪽길로 내려갔다.
齊安黃公 贊永之墓 廣州張氏 贊朋祔左(제안황공 찬영지묘 광주장씨 찬붕부좌)
제5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이 되어 봉분이 없다.
추은 황찬영공께서는 아버님 숭령전참봉 연기선생과 어머님 김해김여사의 장남으로 1892년 음 7월 16일 평남도 대동군 좌경면 영장리에서 태어나시어 18세때 까지 서당에서 한문 경전들을 수학하시다가 평양숭실중학교에 입학하신 뒤 숭덕고등학교 교사가 되시다. 동교 재직시인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때는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평양시내에 배포하는 책임을 맡으셨다가 피체되시어 2년 체형의 판결을 받으시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동안 실형을 치르신 다음 가출옥하시다. 이듬해 숭실대학과 숭실중등교 교감에 취임하시어 8년동안 근무하시고 사임하시다. 그 후에는 농토개량사업에 전념하시어 본군내는 물론이고 인접한 평원군내에 까지 많은 농지를 개발하셨는데 본디 의지가 굳으시고 근면하신 한편 관용과 포용력을 겸시하시어 남의 어려움을 항시 도우시는 품성이시어서 해마다 본군 및 평원군 일원의 빈농가에 양곡을 나누어 주시고 많은 고학생의 학자금을 대시는 등 자선과 육영에 공덕이 크셨던 어른으로 평생 이 뜻을 지니고 사시다가 1972년 12월 19일 타계하시다. 유인께서는 아버님 지목선생과 어머님 승평 김여사의 장녀로 1891년 음 12월 7일 평안
추은 황찬영공께서는 아버님 숭령전참봉 연기선생과 어머님 김해김여사의 장남으로 1892년 음 7월 16일 평남도 대동군 좌경면 영장리에서 태어나시어 18세때 까지 서당에서 한문 경전들을 수학하시다가 평양숭실중학교에 입학하신 뒤 숭덕고등학교 교사가 되시다. 동교 재직시인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때는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평양시내에 배포하는 책임을 맡으셨다가 피체되시어 2년 체형의 판결을 받으시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동안 실형을 치르신 다음 가출옥하시다. 이듬해 숭실대학과 숭실중등교 교감에 취임하시어 8년동안 근무하시고 사임하시다. 그 후에는 농토개량사업에 전념하시어 본군내는 물론이고 인접한 평원군내에 까지 많은 농지를 개발하셨는데 본디 의지가 굳으시고 근면하신 한편 관용과 포용력을 겸시하시어 남의 어려움을 항시 도우시는 품성이시어서 해마다 본군 및 평원군 일원의 빈농가에 양곡을 나누어 주시고 많은 고학생의 학자금을 대시는 등 자선과 육영에 공덕이 크셨던 어른으로 평생 이 뜻을 지니고 사시다가 1972년 12월 19일 타계하시다. 유인께서는 아버님 지목선생과 어머님 승평 김여사의 장녀로 1891년 음 12월 7일 평안
남도 대동군 재경면 천서리에서 태어나시다. 천성이 검소하시고 자애심이 두터우시어 언제나 가난한 이들에게 양식과 자신의 의복을 내어주시어 나들이 옷마저 갖추지 못하고 지내신 분으로 한결같이 내조를 극진히 해오시다 1974년 1월 10일 타계하시다.
1975년 8월 15일 미당 서정주 근식
1975년 8월 15일 미당 서정주 근식
'소나기' 라는 소설로 우리에게 친숙한 황순원 선생이 애국지사님의 장남이시다.
광명시 일직동 산26-7 애국지사 황찬영 선생의 묘소를 찾아왔다.
이곳은 호봉골 서독산이라는 이름의 산이다.
이곳은 호봉골 서독산이라는 이름의 산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동명이인이자 임진왜란 당시 같이 전투를 하셨던 무의공 이순신 장군의 묘소 바로 위쪽으로 가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