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 산27-1
- 탐방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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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국 묘는 국립신암선열공원 제 3묘역에 있으며, 묘역번호는 27이다.
이 묘소의 오른쪽에 부인 이혜경 여사의 묘비가 있다.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애국사상 고취와 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한 이혜경의 묘는 제 3묘역에 있으며, 묘역번호는 28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참가시키고, 다시 제 2차 전략을 은신 획책하다가 또 3년간 유인되었으며 1921년 3월 세브란스를 졸업하여 1923년까지 세브란스 의원 의사로 있다가 1945년 대구로 옮아 개업하나, 이때 왜인 항복, 국가 재조의 즈음이라 지방인은 그를 기다려 모든 일을 담착시켰으니 예를 든다면 진주 연합군 환영 준비위원장, 대구박물관 기성회장, 대구대학 기성회 위원, 그 익년 한미협회 경북지부장, 대구 지방심리원 조정위원, 대구검찰청 사법보호위원, 대동청년단 경북단부 후원회장, 대구 소방 후원회 부회장, 또 1948년에는 한국민주당 대구시 집행위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경북 연락부장, 동회 감찰위원장, 잇달아 동회 대구시당 부위원장, 대구박물관 후원회 부회장, 대구 시국 대책위원회 고문, 익년 드디어 경북국방협회 이사 등이었다. 그러나 시국의 차차 안정됨과 나이 늙으므로 그 익년 드디어 일단 공직을 사퇴하고 1963년 의업도 폐하고 여령을 조용히 지내다가 1968년 7월 3일 고종하니 향년 78이오. 이부인은 한산 이씨로서 1890년 1월 18일 서울에서 태어났으니 고의 휘 창식이다. 1908년 정신여중을 나와 1911년 일본 동경여자학원 영문과에서 전일녀들을 누르고 최우로 졸업하여 정신학교 교사로, 성진 보신여중 교사로 1918년까지 재직하고, 다시 원산 마르다윌스 성경학원에 1920년 졸업하자 대한애국부인회 부회장으로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권유한 까닭에 3년간 유인되었으며 1924년 부산 성경학교에, 1926년 대구 성경학교에 재직하였으며, 1945년 복국되자 대한부인회장, 대한적십자사 중앙이사 겸 조직위원, 익년 대구 제일교회 집사 겸 권사, 1951년 대구 수석교회 장로로 각각 피선되었으며, 1963년 국가에서 건국 공로상으로 표창하였으며, 1968년 1월 4일 귀천하니 향년 79라. 이 두 분은 동성동지로서 1923년 성혼하였으며, 이곳 오향에 쌍분되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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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여, 지키자! 여기 이 겨레를 위하여 그 넋과 몸을 바쳐 오던 대한의 아들 딸, 하나님의 아들 딸, 그 넋 하나님의 품안에 그 몸 여기 간직하였네.
동포여, 지키자! 여기 이 겨레를 위하여 그 넋과 몸을 바쳐 오던 대한의 아들 딸, 하나님의 아들 딸, 그 넋 하나님의 품안에 그 몸 여기 간직하였네.
의사 김성국, 의부 이혜경의 묘. 이 묘소의 오른쪽에 부인 이혜경 여사의 묘비가 또 있었다.
김성국 의사(金成國 義士) 1893-1970 / 묘역번호 : 27
.훈격 : 무후로 인한 서훈 미취득. 경남 양산 출신
.안장일시 : 1970년 1월 15일
1910년 경술국치 후 경성의 각 학교 학생 중심으로 연합하여 합방결사반대 운동으로 피검되어 1년간 옥고를 치름. 1919년 원산과 부산의 동지들과 연락, 독립선언서 배포로 피체되어 1년형의 옥고를 치름.
.훈격 : 무후로 인한 서훈 미취득. 경남 양산 출신
.안장일시 : 1970년 1월 15일
1910년 경술국치 후 경성의 각 학교 학생 중심으로 연합하여 합방결사반대 운동으로 피검되어 1년간 옥고를 치름. 1919년 원산과 부산의 동지들과 연락, 독립선언서 배포로 피체되어 1년형의 옥고를 치름.
우리 의사 김성국, 의부 이혜경 두 분이 여기 누우셨다. 여기는 우리 겨레에게 바치신 의열의 체백들을 받드는 대구시 신암동 산의 묘지요. 의사는 그 선대는 경주인으로서 양산 상북면 상삼리에 살아 1891년 3월 5일 의사를 낳았으며, 고의 휘 량희라. 1910년 일본의 침압에 인한 합병이라는 민족적 비극이 일어났다. 그는 경신학교 재학 중 비분을 이기지 못하여 애국지사 및 학생들과 구국밀모를 하다가 1913년 적옥에 1년 동안 유인되었으며 1919년 민족독립선언의 즈음 그는 세브란스 의전 재학 중 미리 원산 및 부산의 애국자들에게 연락 책임을 띠고 밀방하여 함께 일어나도록 정약한 뒤 3월 1일 세브란스 학생을 이끌어 탑동공원의 선언과 시가지행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