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달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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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 산27-1
탐방로그
서달수 묘는 국립신암선열공원 제 3묘역에 있으며, 묘역번호는 16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民族義士 徐達洙 先生之墓(민족의사 서달수 선생의 묘)
서달수(徐達洙) 1920-1992 / 묘역번호 : 16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운동계열 : 일본 방면, 경북 경주
.안장일시 : 1992년 2월 27일
1938년 일본대학 재학 중 학술연구단체로 위장한 항일결사 비밀동지회를 조직하여 항일독립활동 중 1941년 체포, 국내로 이송,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으로 옥고를 치렀다.
백두 금강 정기 받아 여기 영글어 민족의 생명 어린 진단 삼천리 반만년 청사 등에 성화를 켜고 해고석란 살아갈 백민의 성자천지 함께 구원한 민족적 정기 그 정기의 맥을 타고 조국 광복에 궐연히 분기한 항일의 의사 특립한 그는 바로 연봉 서선생 선생 휘는 달수 자는 소보 호는 연봉 성은 서씨 관은 이천 라말 시조 아간공의 묘예로서 고는 수석 비는 김녕 김씨 광복 전 경신(1920년) 음 4월 17일에 태어나 대한민국 임신(1992년) 양2월 염4일에 장서하니 享壽耆+又加三生而英慧하고 재기과인하며 용감 정의로우면서 온혜명달하였다. 일찍이 신학문에 눈뜨고 서울 양정고보 필업 후 도부상하여 일본 대학 정치학과에 입학 자자탁옥하던 중 당시 일제의 재일 교포 학대와 유학생들에 대한 차별 채점 대우 등 갖가지 압박 감시에 분격 민족 정기의 둑기를 높이 들고 비장한 각오로 국권 회복 항일 투쟁에 나섰다. 선생은 일본 대학 예술과생 김덕곤 동대학 부속 상
교생 이은덕을 그의 하숙방(서원방 2층)에 초지 비밀 항일단체를 결성키로 합의하고 동지 규합에 나서 일본대학 김학구 전수대학 이건수를 영입하였으나 집합장소 불안으로 명치고관 미망인 이등킹 노파집 2층에 하숙방을 옮기고 몰래 일본인 가장 가명을 송본효일이라 하였다. 그 뒤 상 야음 악학교 안수현 동경 철도학교 박곤태 동양대학 김재석 마포수의학교 최성탁과 고물상 장남 박서운개를 포섭 기묘(1939년) 2월 8일 동경학생 독립선언 기념일에 상해장에서 오료하고 9인이 박서운개 창고에서 밀회 교포 학생 동지회라 정하고 선생을 총책 겸 재무 김덕곤을 국내책 김홍구를 동원책 이은덕을 전단 선전책 이건수를 조직 책 안수현을 정보책 박곤태를 무기 화약책 박서운개를 각 제작품 보관책 김재석을 연락통 정책으로 분담 굳은 맹세 아래 거사일은 명치신궁 조경 야구전날로 하고 폭파 목표물은 이중교와 시내 중요 관서로 정하였다. 거사용 폭탄 8개와 전단 천여 장을 준비 완료 투탄자는 선생과 박곤태 김홍구 이은덕으로 정하고 대한 청년 결사대라 명명 만약 실패 시엔 한청을 새긴 칼로 자결을 맹세 그 칼은 현재 선생 댁에 보관 중이다. 치밀하게 계획된 이 투탄 거사를 단행키로 하였으나 기묘(1939년) 10월 8일 선생이 왜경에게 체포되자 이 거사는 수포로 돌아갔다. 다행히 김덕곤 김재석 이건수 박서운개가 은신 물증이 전무하였으므로 결사 내막을 파헤치지 못하였다. 선생 등이 1년 6월간 살육적 고문에도 함구 일관타가 이은덕 안수현은 옥사하였다. 국내책이 체포되자 선생과 박곤태 김홍구도 신미년 4월 염일 부산 이송 혹독 고문을 감행해도 별무성과이므로 왜적들은 동년 11월 18일 치안유지법 위반 죄명으로 선생에겐 2년 김덕곤 김홍구 박곤태에겐 각 1년 징역을 선고함으로써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만년 독립유공자 협회 전국부회장 겸 대구 경북 지회장을 재임하면서 많은 공을 세웠다. 배 수원 백씨 숙덕 있었고 남 동준 동흡 동진 서생 배우순 녀 경희 손 병대 병호 외손 재현 여는 불진록 선생 현합이 蝸廬(와려)를 찾아와 명을 청하므로
꿋꿋한 저 기상은 운천도 능가하고 활활타는 이 정열은 금석도 꿰뚫어라
천추에 취웅사도타고 그 이름 빛나리라. 아름다운 이 호산에 흑치떼가 짓밟을 제
주권 회복 기빨들고 항일투쟁 당당대의 만고에 빈자일등 마냥 그 이름 빛나리라
단기 4325년 임신 남풍절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달성 서수생 근찬 진주 소효영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