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 산27-1
- 탐방로그
- 정동석 묘는 국립신암선열공원 제 3묘역에 있으며, 묘역번호는 15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1992년 임신 3월 일
옥산 김중현 근찬
달성 서석준 근서
옥산 김중현 근찬
달성 서석준 근서
愛國志士 雲岡 鄭東錫 之墓(애국지사 운강 정동석의 묘)
정동석(鄭東錫) 1885-1968 / 묘역번호 : 15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1992년)
.운동계열 : 임시정부, 대구 달성
.안장일시 : 1992년 5월 21일
1919년 상해임시정부 재정지원활동으로 대구에서 군자금 모집 중이던 송두환 동지로부터 권총 2정 실탄 10여발 은닉 협조, 1920년 신암동 구장으로 재직 중 다시 총 3정, 실탄 300여발을 보관 중 동지들의 독립운동 활동으로 발각되어 체포, 1924년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받고 출옥하다.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1992년)
.운동계열 : 임시정부, 대구 달성
.안장일시 : 1992년 5월 21일
1919년 상해임시정부 재정지원활동으로 대구에서 군자금 모집 중이던 송두환 동지로부터 권총 2정 실탄 10여발 은닉 협조, 1920년 신암동 구장으로 재직 중 다시 총 3정, 실탄 300여발을 보관 중 동지들의 독립운동 활동으로 발각되어 체포, 1924년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받고 출옥하다.
운강 공적사
동래 정씨 29세 정기갑 공과 월성 이씨의 외아들로 대구에서 출생. 한학을 전수 널리 후학들을 교도하였고 일제 무단 정치로 우리 민족의 생명과 재산이 유린 당하고 양민이 투옥되는 등 갖은 학정을 보고 분기 항거하면서 만고의 사태에 대비 호적명 윤주를 은폐코자 가명인 동석으로 사용 고인이 된 형 금도 동석으로 통용된다. 송두환 동지가 주축이 된 배일단체인 신배달회 및 빈민회에 가담하여 항일 독립운동에 결사적으로 활약하던 중 동지들이 상해 임정으로부터 인수 지참한 다수의 무기와 실탄 및 비밀 문서 보관을 위임받고 본가 지하에 은밀히 보관하고서 무력투쟁으로 전환코자 경남북 일원을 동분서주하여 많은 동지를 규합하는 동시 임정 군자금 모금을 하던 중 3.1운동이 일제 강압으로 무산되자 항일 주비단을 조직 제2경북사건을 동지들과 비밀 수에 모의 실천코자 했으나 경남 선녕 일인 순사 갑비 살해 사건 후 노기용 동지가 체포되면서 주비단 조직이 탄로되어 무력투쟁 감행 즉전 일경에 많은 동지들과 피검되고 보관 중이던 무기와 실탄 비밀 문서 전부를 압수 당하고 특히 정동석 동지에게는 무기 반입출 경위와 군사 주비단 조직 및 임정 자금 조달에 대한 전모를 조사하기 위하여 3년 여 동안 혹독한 고문과 박해가 가해졌다. 출옥 후에도 배일사상을 널리 고취. 옛 동지들과 연락 지하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므로 항상 요시찰 인물로 지목받아 수십차에 긍한 경찰 조사를 받는 등 갖은 고난을 당하여 오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해방 후 건국운동에도 참여하면서 김구 선생 등 예경북부위원장 등 지역 육영사업에도 활동 공헌하시다가 1967년 83세를 일기로 영면하시고 대통령으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음
동래 정씨 29세 정기갑 공과 월성 이씨의 외아들로 대구에서 출생. 한학을 전수 널리 후학들을 교도하였고 일제 무단 정치로 우리 민족의 생명과 재산이 유린 당하고 양민이 투옥되는 등 갖은 학정을 보고 분기 항거하면서 만고의 사태에 대비 호적명 윤주를 은폐코자 가명인 동석으로 사용 고인이 된 형 금도 동석으로 통용된다. 송두환 동지가 주축이 된 배일단체인 신배달회 및 빈민회에 가담하여 항일 독립운동에 결사적으로 활약하던 중 동지들이 상해 임정으로부터 인수 지참한 다수의 무기와 실탄 및 비밀 문서 보관을 위임받고 본가 지하에 은밀히 보관하고서 무력투쟁으로 전환코자 경남북 일원을 동분서주하여 많은 동지를 규합하는 동시 임정 군자금 모금을 하던 중 3.1운동이 일제 강압으로 무산되자 항일 주비단을 조직 제2경북사건을 동지들과 비밀 수에 모의 실천코자 했으나 경남 선녕 일인 순사 갑비 살해 사건 후 노기용 동지가 체포되면서 주비단 조직이 탄로되어 무력투쟁 감행 즉전 일경에 많은 동지들과 피검되고 보관 중이던 무기와 실탄 비밀 문서 전부를 압수 당하고 특히 정동석 동지에게는 무기 반입출 경위와 군사 주비단 조직 및 임정 자금 조달에 대한 전모를 조사하기 위하여 3년 여 동안 혹독한 고문과 박해가 가해졌다. 출옥 후에도 배일사상을 널리 고취. 옛 동지들과 연락 지하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므로 항상 요시찰 인물로 지목받아 수십차에 긍한 경찰 조사를 받는 등 갖은 고난을 당하여 오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해방 후 건국운동에도 참여하면서 김구 선생 등 예경북부위원장 등 지역 육영사업에도 활동 공헌하시다가 1967년 83세를 일기로 영면하시고 대통령으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