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 산27-1
- 탐방로그
- 최태석 묘는 국립신암선열공원 제 2묘역에 있으며, 묘역번호는 14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끊는 젊은 학도로서 이런 환경 속에서 묵묵히 공부만을 할 수 없어 뜻있는 동지들이 모여서 나라찾기 독립운동을 펼치기로 결심하고 1939년 8월 7일 밤 왜관 학생 근로 봉사를 계기로 낙동강 백사장에서 권쾌복 배학보 김성권 문덕길 등 17명의 동지가 모여서 비밀 결사 백의단을 조직하여 1년 반 여 동안 우리 역사 우리 문화를 연구하고 문예와 운동을 통하여 독립정신을 길렀다. 이때가 선생의 3학년 때였다. 그리하여 1941년 2월 15일 밤 대구시 봉산동 242번지 이용남 씨 집에서 권쾌복 배학보 최영백 김성권 문덕길 유흥수 이주호 등 동지 17명이 모여서 선배들이 조직한 문예부 연구회를 통합한 비밀 결사 차혁당을 조직하여 명실 공히 대구 사범학교 학생 독립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다하였다. 이때가 선생의 4학년 말로서 말구에 5학년이 되는 때였다. 1941년 11월 대구 사범학교 차혁당 운동이 탄로가 나서 대전 감옥에 구금되고 2년 여의 예심을 거쳐 2년 6월의 징역형을 받아 복역하다가 8.15 광복으로 풀려났다. 1946년 2월에 대구 사범학교 심상과를 입학한 지 10년 만에 졸업을 하게 되었다. 선생은 또 향학의 뜻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1949년 3월에 국학대학 문학부 국문학과에 입학하여 1960년 3월에 동 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하는 영광을 얻었다. 1946년 2월부터 청도 초등학교 교사로 출발하여 모계 중고등학교 교사와 김천 여자 중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65년 4월에 풍각 농업고등학교 교감으로 승진하여 근무하다가 길안 중학교 교장 금천 중고등학교 교장 칠곡 중학교 교장자인 중고등학교 교장 봉양 중상업 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시고 정년 퇴임하였다. 선생의 일생은 파란곡절도 많았으나 처음에는 독립운동으로 국가와 민족에 충성을 다하고 여생은 교육 창달에 몸바쳐 국가에 공헌하였다. 참 진실하고 고귀한 한평생이었다. 1995년 19월 9일 대구 보훈병원에서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
치니 광복회 대구지부에서는 동구 신암동에 있는 선열묘역에 안장하였다. 1991년 8월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헌법의 규정에 따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으며 부인 남평문씨 방우 여사는 휘 수갑공의 따님으로 부덕이 높고 슬하에 1남 5녀를 두었는데 장남 재우는 자부 김해김씨 정화와의 사이에 손 형기를 두고 있으며 장녀 숙례는 재령이씨 병철에게 출가하여 외손 혜령 창섭을 두고 차녀 옥례는 충주석씨 진섭에게 출가하여 외손 지훈 재호를 두고 3녀 복희는 영월엄씨 진용에게 출가하여 외손 희욱 태원을 두고 4녀 숙향은 연일정씨 철원에게 출가하여 외손 완규를 두고 5녀 윤주는 아직 미혼이다.
1998년 4월 6일 남평인 문덕길 찬
1998년 4월 6일 남평인 문덕길 찬
愛國志士 東隱 崔泰碩 之墓(애국지사 동은 최태석의 묘)
최태석(崔泰碩) 1920~1995 / 묘역번호 : 14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운동계열 : 대구사범학생운동, 경북 청도
.안장일시 : 1995년 10월 12일
1941년 2월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항일학생결사 다혁당을 조직함. 민족차별적 교육제도 철폐 등을 요구하며 실력 양성. 조국 독립 촉진 중 비밀결사조직 발각으로 체포. 징역 2년 6월형으로 옥고를 치렀다.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운동계열 : 대구사범학생운동, 경북 청도
.안장일시 : 1995년 10월 12일
1941년 2월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항일학생결사 다혁당을 조직함. 민족차별적 교육제도 철폐 등을 요구하며 실력 양성. 조국 독립 촉진 중 비밀결사조직 발각으로 체포. 징역 2년 6월형으로 옥고를 치렀다.
선생의 휘는 태석이요 일명 예숙이다. 호는 동은 영천 최씨이며 1921년 1월 1일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송원동 173번지에서 출생하였다. 영천 최씨 시조 연산 부원군 최한 공의 22세손이신 부 휘 종박 공과 모 김해 김씨 휘 순령 여사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풍모가 준수하고 품성이 총명하며 정의감을 겸비하였다. 어릴적에는 향리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고향 청도 초등학교를 졸업하여 1937년 4월에 청운의 꿈을 안고 당시 수재들이 모여 드는 관립 대구 사범학교 심상과에 입학하였다. 그때는 벌써 우리나라는 왜제에게 국권을 침탈 당하여 민족의 설음을 한없이 받고 있을때라 선생의 꿈과 희망은 산산히 무너지고 우리의 자유를 속박받고 한일학생의 차별 대우에 시달리면서 소위 군국주의 독재는 날이 갈수록 더하고 학생으로서 수학 생활이 평탄치 못하였다. 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