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384
- 탐방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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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응의 고택은 대구 옻골마을에 위치하며, 월연댁이라고 불린다. 새롭게 건립하며 붙여진 택호는 금전고택이다.
생가와 고택이 나란히 앞뒤로 붙어있는데, 최종응의 생가는 바로 뒤에 위치해있으며, 둔산동 382번지이다.
월연댁은 고택이고, 생가도 옆에 존재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생가와 고택이 나란히 앞뒤로 붙어 있었다.
대구 둔산동 경주최씨 종택(大邱 屯山洞 慶州崔氏 宗宅)
조선 인조 때의 학자 대암 최동집(臺巖 崔東㠍)이 1616년 옻골에 정착하면서 그 이후에 지은 집으로, 대구에 있는 조선시대 주택 중 가장 오래되었다. 1630년에 지은 안채와, 원래 백불암 최흥원(百弗庵 崔興遠)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한 동산서원이 1868년 훼철되면서 그 자재를 사용하여 다시 지은 사랑채,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어진 보본당과 포사, 그리고 불천위 사당인 별묘와 가묘 등이 있다. 생활공간의 오른쪽에 있는 본당은 1753년에 지었으며, 보본당의 동쪽담장 밖에 위치한 포사에서는 제사음식을 준비하였다고 한다. 보본당 뒤편에 있는 2동의 사당 중 별묘는 최동집의 위패를 가는 조선 정조 때의 학자인 최흥원의 패와 종손의 4대 봉사위 위패를 모시고 있다. 살림채와 재실·사당 등 많은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대구 둔산동 경주최씨 종택은 조선시대 양반주택과 그 생활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선 인조 때의 학자 대암 최동집(臺巖 崔東㠍)이 1616년 옻골에 정착하면서 그 이후에 지은 집으로, 대구에 있는 조선시대 주택 중 가장 오래되었다. 1630년에 지은 안채와, 원래 백불암 최흥원(百弗庵 崔興遠)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한 동산서원이 1868년 훼철되면서 그 자재를 사용하여 다시 지은 사랑채,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어진 보본당과 포사, 그리고 불천위 사당인 별묘와 가묘 등이 있다. 생활공간의 오른쪽에 있는 본당은 1753년에 지었으며, 보본당의 동쪽담장 밖에 위치한 포사에서는 제사음식을 준비하였다고 한다. 보본당 뒤편에 있는 2동의 사당 중 별묘는 최동집의 위패를 가는 조선 정조 때의 학자인 최흥원의 패와 종손의 4대 봉사위 위패를 모시고 있다. 살림채와 재실·사당 등 많은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대구 둔산동 경주최씨 종택은 조선시대 양반주택과 그 생활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월연댁
이곳이 월연댁인데 새롭게 건립하면서 택호를 琴田古宅(금전고택)으로 붙였다.
최종응의 생가는 바로 뒤에 위치해있으며, 둔산동 382번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