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 산48
- 탐방로그
- 이윤재 선생 묘소를 찾기 위해 대구 달성군에 왔다. 하지만 탐방 이후에 선생의 묘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1-1묘역(묘비번호 499)로 이장되었다. 또한 묘비 역시 김해한글박물관 근처에 세워져있는 이윤재 선생의 조형물 근처로 옮겨졌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공은 기원 4221년 12월 25일에 경상남도 김해에서 이용준씨의 맏 아드님으로 태어나서 김해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김해 합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시다가 대시 대구 계성학교에서 학업을 닦은후 마산 창신학교 의신여학교에서 일곱해 동안 평안북도 영변 숭덕학교에서 한 해 동안 교육에 종사하시었다.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그 곳에서 일본 관헌에게 잡히어 평양감옥에서 삼년동안 고초를 지난 후 공은 큰 뜻을 품고 중국으로 가 국립 북경대학 사학과에서 4257년 7월까지 삼년동안 역사를 연구하시고 고국에 돌아오자 그 해 9월 부터 평안북도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시었다. 공의 목적은 왜적의 악정으로 잊어버려가는 우리 말을 찾고 시들어가는 배달 넋을 살림에 있었다. 그리하여 4258년 4월부터는 우리의 수도 서울로 와서 앉은 자리가 더을 사이도 없이 동으로 서으로 분주하게 협성학교 경신학교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연희전문학교의 교편을 차례로 잡으시었고 또 배재와 중앙의 두 고등
보통학교와 감리교 신학교들의 교직을 겸임하기도 하시었으니 이 여러 학교에서 공의 가르침을 받은 실로 여러 만이 될것이다. 그러는 한편에 "한글" 편집을 홀로 맏아 출판하기에 골몰하시는 가운데 그 씀이 부족하면 사전을 들여 발행을 계속하기도 하고, 혹은 전당을 잡히거나 저작권을 팔아 보태기도 하였으며 또 동아일보 조선일보 그 밖의 신문과 잡지들에 글을 실어 새 맞춤법을 널리 펴며 혹은 선조들의 끼친 문화의 역사를 소개하였고 또 사전 편찬에도 종사하였다.
청백한 공은 끼니가 없어도 태연하였다. 그리고 공은 늘 빈곤한 중에 값없이 또는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일만 많이 한 탓으로 떄로는 빈혈증으로 졸도도 하고 때로는 각혈로 넘어지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아무 갚음이 없고 빈곤만이 따르는 공에게 또사디 액운이 닥쳐왔다. 4270년 6월 7일 등우회와 흥사단 사건으로 검거의 선풍이 일게 되자, 공은 서대문 감옥에서 한 해 동안 욕을 당하게 되었으니 이 두번째 영욕의 고초다. 그러나 공은 출옥하자 곧 대동출판사에서 출판물의 글과 맞춤법을 바로 잡는 일에 힘을 다하였고, 기 뒤 기독신문사의 주필이 되어 떨치지 못하는 교역자를 일깨우며, 여위어 가는 신자들의 넋을 순결하게 하는 동시에 일반 사회보다 뒤진 교회 출판물의 한글 맞춤법을 바로 잡기에 노력하시었다. 피 흘리지 않고 우리 조선과 만주를 삼킨 왜적은 또 중국 침략전을 일으키는 한편 우리 조선 민족을 군티 없는 일본 일본사람으로 만들어볼량으로 학교에서 가정에서 우리 말까지 없애려는 갖은 압박과 잔인무도한 악정을 베풀었다. 그리하여 4275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는 이 학정에 유린을 당하게 되자 공은 그 중심 인물로 함경남도 흥원경찰서에 갿히게 되었으니 이 세번째 누설의 욕이다. 1년을 하루 같이 갖은 고문을 당하게 되었으나 공은 오히려 웃음으로 악마 같은 그들을 타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은 그 악형과 고초로 말미암아 점점 쇠약하여졌던 것이다. 그 리하여 그 다음 해 9월 13일에 함흥감옥으로 옮기게 되고 또 예심에서 불게 되던 그 해 겨울 곧 4276년 12월 8일 찬 바람이 살을 에는 감옥 독방에서 병으로 고통하다가 의약은 커녕 따뜻한 물 한모금 얻어 마실 길 없이 한 많은 이 세상을 영원히 가시고 말았다. 공의 성격은 지극히 청렴하고 결백하였다. 지극히 인자하고 겸손하였다. 지극히 평화스러워 성내는 일이 없었다. 종교로는 예수교의 잘오였으며 일생 사업으로는 혀와 붓을 통하여서의 교육이었다. 인격혁신과 정치혁명을 위하여서는 해외에서 "흥사단"에 국내에 와서는 "수양동우회"에 관계하여 심력을 다하였고 국사를 통하여 조선의 넋을 살리기 위하여는 "진단학회"를 일으키었고 우리 말과 글을 바로 잡기 위하여는 "조선어학회"의 중진이 되었던 것이다.
아! 슬프고 쓰린 일이다. 공이 일생을 두고 분투노력하던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보지
청백한 공은 끼니가 없어도 태연하였다. 그리고 공은 늘 빈곤한 중에 값없이 또는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일만 많이 한 탓으로 떄로는 빈혈증으로 졸도도 하고 때로는 각혈로 넘어지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아무 갚음이 없고 빈곤만이 따르는 공에게 또사디 액운이 닥쳐왔다. 4270년 6월 7일 등우회와 흥사단 사건으로 검거의 선풍이 일게 되자, 공은 서대문 감옥에서 한 해 동안 욕을 당하게 되었으니 이 두번째 영욕의 고초다. 그러나 공은 출옥하자 곧 대동출판사에서 출판물의 글과 맞춤법을 바로 잡는 일에 힘을 다하였고, 기 뒤 기독신문사의 주필이 되어 떨치지 못하는 교역자를 일깨우며, 여위어 가는 신자들의 넋을 순결하게 하는 동시에 일반 사회보다 뒤진 교회 출판물의 한글 맞춤법을 바로 잡기에 노력하시었다. 피 흘리지 않고 우리 조선과 만주를 삼킨 왜적은 또 중국 침략전을 일으키는 한편 우리 조선 민족을 군티 없는 일본 일본사람으로 만들어볼량으로 학교에서 가정에서 우리 말까지 없애려는 갖은 압박과 잔인무도한 악정을 베풀었다. 그리하여 4275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는 이 학정에 유린을 당하게 되자 공은 그 중심 인물로 함경남도 흥원경찰서에 갿히게 되었으니 이 세번째 누설의 욕이다. 1년을 하루 같이 갖은 고문을 당하게 되었으나 공은 오히려 웃음으로 악마 같은 그들을 타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은 그 악형과 고초로 말미암아 점점 쇠약하여졌던 것이다. 그 리하여 그 다음 해 9월 13일에 함흥감옥으로 옮기게 되고 또 예심에서 불게 되던 그 해 겨울 곧 4276년 12월 8일 찬 바람이 살을 에는 감옥 독방에서 병으로 고통하다가 의약은 커녕 따뜻한 물 한모금 얻어 마실 길 없이 한 많은 이 세상을 영원히 가시고 말았다. 공의 성격은 지극히 청렴하고 결백하였다. 지극히 인자하고 겸손하였다. 지극히 평화스러워 성내는 일이 없었다. 종교로는 예수교의 잘오였으며 일생 사업으로는 혀와 붓을 통하여서의 교육이었다. 인격혁신과 정치혁명을 위하여서는 해외에서 "흥사단"에 국내에 와서는 "수양동우회"에 관계하여 심력을 다하였고 국사를 통하여 조선의 넋을 살리기 위하여는 "진단학회"를 일으키었고 우리 말과 글을 바로 잡기 위하여는 "조선어학회"의 중진이 되었던 것이다.
아! 슬프고 쓰린 일이다. 공이 일생을 두고 분투노력하던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보지
못하고 원수의 손에 희생되어 가시었다. 그러나 공은 저 누리에서도 원수의 몰락을 웃으면서 우리 겨레의 행운을 가려할 줄 믿는다. 공의 사사로의 생애를 돌아보면 오직 원갑 원주 두 아들과 아무 만재 문호를 지키고 순경 무궁화 영?? 딸을 두었는데 맏이 김병재에게 가운데가 박종식에게 망내가 이혁종에게 시집갔다. 아! 슬프다 옷 깃을 적실뿐이다.
기원 4279년 4월 6일 벗 한결 김윤경
기원 4279년 4월 6일 벗 한결 김윤경
대구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 산 48 돌산 중턱 국학자 환산 이윤재 선생 묘를 찾았다.
환산 이윤재 선생의 묘소 표지석
이윤재 선생의 옛 묘소이다.
국학자 환산 이윤재님 무덤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회원 33명이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완성된 사전 원고를 압수당하고 함흥형무소로 이송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여 환산 이윤재와 효창 한징은 순국하셨다.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회원 33명이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완성된 사전 원고를 압수당하고 함흥형무소로 이송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여 환산 이윤재와 효창 한징은 순국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