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욱 송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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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대구광역시 달서구 이곡동 1189
탐방로그
김병욱 송덕비는 대구 와룡공원 내에 있으며, 바로 옆에 허계이 공덕불망비가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도를 수지한 우국지사요 위민자선의 거벽이였다. 배 수원백씨에서 장적은 종열이라 공의 송덕비건립추진위원회에서 불녕에게 비문을 청하므로 공의 의기와 홍덕을 후세에 길이 빛내기위하여 동호지필로 한돌에 새겨기리면서 파경의 정을 본받아 공의 진자를 그려 ?언한다. 나라사랑 겨레사랑 백세사도 의기높고 위민봉사 자선홍덕 저 벽락에 푸르르고 언제나 고담월광따라 그 이름 빛나고 천추에 우뚝솟은 비슬의 기상인양 만고에 치릉치릉 낙동의 심상인양 언제나 창?의 태백인양 길이길이 빛나리라
고담 김병욱 선생의 비는 파산동 도로변 야산에 있었으나 계명대학교 구내에 편입도였으며 익제 허계이선생의 비는 화원 구라동 수문옆 제방둑에 위치하여 도로개설예정지가 되였으므로 더 이상 방치해둘수 없어 두분의 비를 이곳 와룡산기슭 공원내로 이전케되였다. 이 사업을 추진함에 있어 김녕김씨(충예공파)문중과 김해허씨(의랑공파)문중에서 협조가 지대하였으며 더불어 지역후진으로서의 사명감을 갖고 본 사업에 동참하신 추진위원제씨의 명단을 밝혀둔다.
愛國志士 古潭 金炳旭 頌德碑(애국지사 고담 김병욱 송덕비)
愛國志士 古潭 金炳旭 頌德碑(애국지사 고담 김병욱 송덕비)
서라벌 정기받아 여기 엉글어 민족의 생명이 서린 달벌 옛 고장 이곡길상지에서 일제하에선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하고 광복후엔 위민호암축제에 심혈을 경주함으로서 혁공을 세운 애국지사 고담 김공이 천추비슬과 더불어 탁연히 섰다. 고으이 이름은 병욱 자는 주홍 호는 고담이요 성은 김씨 본은 김녕이라. 중시조 휘 시흥 시 문열공은 고려 인종시 위국공신 김녕군이며 17대조 휘 문기 호 백촌 시 충의공은 정충대절이 이월쟁광하였으며 10대조 휘 응수 호 개암 자헌대부 고향 영동으로부터 성서로 이거하셨다. 고 휘 형두 비 여강이씨 공은 서기 1920년 경신 5월 28일에 대구 이곡리절에서 고고지성을 울렸다. 생이영민 과묵하고 민족의식이 강했던 공은 1940년 2월 조형길 현영만동지와 양산통도사에서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할것을 밀약 그 방편으로 대구사범학교에 들어가 가로 합의하고 동년 4월 동교에 입학 5명의 동지를 포섭 동년 12월 1일 비밀결사 무우원을 창단하고 동지포섭 일제 몰략전 자원동원거부 독립쟁취자금 모금과 더부러 문장연구 글공부등의 위장표제한 유인물을 발간 배포하여 민족정기를 고취하였다. 43년
1월에는 공도 도일하여 재동경 조형길 최수원 강증용동지등과 누차 밀회를 가져 조직확대 강화 해외 독립운동단체와의 접선 결정적 행동방책등을 모의하면서 독립운동자금을 저단금이라 명명 일천만원모금액을 결의하고 공은 국내책임자로 선임되였다.공은 일본국내의 전시사정을 살피고 환국하여 저단금모금등 항일운동에 전념하던중 왜경에 탐지되어 동지 18명 전원이 대구경찰서 고등계에 피검되여 혹독한 고문으로 1년여의 예심끝에 동44년 6월 왜적 고도신예랑 김형부....재판에서 3년6개월의 형을 선고받고 즉석에서 상고를 포기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다 조국광복으로 출옥한 애국지사였다. 공은 일제의??에서 벗어난 뒤는 고향에서 식산흥업에 힘쓰면서 지방의화와 사회사업에 정열으르 불어넣고 애국애향하였다, 1953년 10월 성서면 의회초대의장 동56년 10월 달성군 참사회 부의장 동57년 4월 달성군 교육청 교육위원에 당선되였으며 동년 10월에 대구시의회 의원 동59년 11월 동의회 건설분과위원장에 피선되였으며 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시의회의 시정??위원으로 선임되였으며 67년 1월 1일 달성농지개량조합장에 피임되더니 69년 1월에 5차연임되어 대구와 창녕을 포함한 달성군 일원 수리사업에 혁공을 세웠다. 취중 낙동강제방공사는 위국택민의 대성사가 않일수 없다. 공은 1953년 12월 부터 동 64년 12월까지 총 11개년에 걸쳐 중앙과 지방관서에 수백차 왕래하면서 천신만고의 고초를 겪고 이 대역사를 완수하였으나 한분의 ??없음은 물론 사재마져 쾌척하였으며 천여필의 각종부지 국유이전등기업무도 농민부담을 염려 친히 실행하는 등 공의 문전옥답30 여두락을 바쳐 준역하였으니 어찌 갸륵치않으리오, 이 제방은 폭50미터에 전장 6km에 달하는 대공사고 ?리면?800정이 옥토로 화해저 년간 사만수천석을 생산하는 만년풍작의 옥야를 이룩하였다. 아울러 공은 달성농지개량조합장으로 재직하면서 동년 평야의 년간 7억원에 달하는 내수피해를 막기위하여 대단위 배수장 2개소와 천여미터의 턴넬을 통한 양수장을 설치하여 대한불가의 옥토를 이룩하였으니 향민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공은 의지가 굳세고 끈기있고 슬기로운 대장부로서 사생취의하는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