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광주광역시 동구 금동 97-1
- 탐방로그
- 집터 안내판은 존재하나 이 집이 장재성, 장매성 형제가 살던 집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확인이 필요하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독립운동가
장재성.장매성 집터
인문산책길, 광주광역시 동구
장재성.장매성 집터
인문산책길, 광주광역시 동구
입구에 있는 안내판의 두 남매에 대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는 안내판을 찾고 있다.
장재성.장매성 집터 / 광주 동구 금동 97(옛 금계리 97)
장재성(張載性, 1908~1950)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핵심 지도자로서, 광주고등보통학교 5학년이던 1926년, 비밀단체 '성진회'를 조직했다. 1929년 일본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 '독서회중앙본부'를 조직하여 광주고등보통학교 등에 독서회를 조직하는 등 항일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발발하자 광주의 학생시위를 총지휘하였고, 이로 인해 관련자 중 가장 무거운 4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 조직부장 등을 지냈다.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였다가 체포되었고, 광주형무소에 수감 중 6.25전쟁이 발발하여 처형되었다.
그의 동생 장매성(張梅性, 1911~1993)은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독서회의 수장으로, 역시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검거, 광주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장매성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장재성(張載性, 1908~1950)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핵심 지도자로서, 광주고등보통학교 5학년이던 1926년, 비밀단체 '성진회'를 조직했다. 1929년 일본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 '독서회중앙본부'를 조직하여 광주고등보통학교 등에 독서회를 조직하는 등 항일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발발하자 광주의 학생시위를 총지휘하였고, 이로 인해 관련자 중 가장 무거운 4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 조직부장 등을 지냈다.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였다가 체포되었고, 광주형무소에 수감 중 6.25전쟁이 발발하여 처형되었다.
그의 동생 장매성(張梅性, 1911~1993)은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독서회의 수장으로, 역시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검거, 광주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장매성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광주 동구 금동 97-1 독립운동가 장재성.장매성 남매 집터 안내판을 찾고 있다.
언론에 나온 '독립운동가 장재성.장매성 남매 집터 안내판'은 붉은 벽돌 배경이어서 붉은 벽돌집을 찾고 있다.
'독립운동가 장재성.장매성 남매 집터'를 알려주는 입구 안내판보다 집터 안내판을 먼저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