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향 기념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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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광주광역시 남구 봉선동 산127-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의 정열 소년 선도에의 성심 사회 봉사에의 수범 등으로 미루어 당연한 포상이라 할 것이다. 나는 3.1동지회장으로서 3.1 만세의거 당시 본인이 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하는 과정에서 직접 목격한 바를 회상하면서 당시의 재판서(대정 8년 형 제558호 및 제358호 제 910호)및 독립운동사 3권 8권 9권 호남절의사(서정상 편저) 일제하 광주학생 민족운동사(한정일 저) 한국여성독립운동사(3.1여성동지회) 3.1여성(3.1여성동지회) 광복의 횃불(광복회 전남지회) 전라남도지 광주시사 제2권의 기록과 한국일보 광주일보 조선일보 등 기사 애국지사 조길용(건국훈장 국민장 262호) 동 문동길(건국포장 850호) 동 김상권(건국포장 1293호) 동 김용준(대통령표창 35125호) 동 김기권(건국포장 1357호) 동 박준채(대통령표창 55108호) 원로서도가 구철우 수피아학교장 김오봉 동교감 문영순 동교 원로동창 조화임 등 제위의 확인과 증언을 토대로 본 비문을 집필하였다.
1987년 9월 일 목정 최한영
이 추모비는 1987년 7월 25일 최현숙 여사 3주기를 맞아 고인의 공적을 추모하고 후세에 귀감이 되게 하고자 최현숙 여사 추모비 건립추진위원회가 기획 추진 감리 조경하고 보훈처에서 비석 및 각자 관련 비용을 지원 시공하였으며 추모비는 3.1독립투사 목정 최한영 선생께서 보훈처의 관련자료를 토대로 객관적 사실 위주로 기술하였고 학정 이돈흥 원장이 썼다
1987년 11월 일 애국지사 최현숙(수향) 여사 추모비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광복회 광주 전남지구 지회장 김상권
愛國志士 建國勳章 愛族章 故 和陀圓 耽津崔氏 賢淑(秀香) 女史
(애국지사 건국훈장 애족장 고 화타원 탐진최씨 현숙(수향) 여사)
추모 헌시

조국의 독립을 외쳐부른 이여.
광주 3.1운동 최연소 옥고지사여.
그때 열다섯살 차랑 차랑 울린
힘찬 만세소리가
하늘 아래 씨알로 묻혀
이 땅에서 뿌리로 움트고 얽혀
자유민주주의 얼이 되신 이여.
열다섯살
그 풋풋한 만세소리.
지금까지 산여울 마음 속에 스며들고
다시 밭여울 불꽃으로 활활타서
우리들 숨소리 속으로 피어나는 꽃이여.
통일을 염원하는 꽃이여.
영혼의 꽃이여.
오늘 다시 옷깃을 여며 님의 곁에 가까이 서면
꽃밭에 짙은 향기 휩싸듯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우리를 휩싸고 돕니다.
마음과 마음으로
뜨거운 불씨를 놓아 엉키며
불타는 애국심이 윗줄처럼 이끌리면서
우리들 깊은 마음 속에 스며듭니다.
임이여
민족의 얼이 되소서.
민족의 빛이 되소서.
민족의 힘이 되소서.

1999.3.1.절
애국지사 최현숙 여사 서거 15주년

손광은 문학박사 글
장전 하남호 글씨
광주광역시 남구 봉선동 문성중학교 맞은편 제석산 생태탐방로입구 애국지사추모동산 최현숙 여사 기념공원을 찾았다.
GPS 상의 주소는 광주광역시 남구 봉선동 산 127-1이다.
독립투사 건국훈장 애족장 최현숙 여사 기념동산, 우국지사 제5대 국회의원 방원 김용환 선생 기념동산
숭모

우국지사 방원 김용환 선생
무등산 ○모인 정기
광주에 서렸는가
광산의 ○ 가문에
어진 ○ 태어났네
큰 덕 ○○은 도량은
여러 사람 ○용하고
뛰어난 재○○○
무리 중에 우뚝했네
가난구난 간절한 맘
성인의 가르침이요
나병 퇴치 아름다운 맘
몸에 밴 사랑이라
사람을 사랑하고
조국을 근심한 평생의 업적
가슴속엔
한점 티끌 볼 수가 없었다네
의절을 지키려고 애썼던
강개한 의지라니
항절의 신고를
일상처럼 격을 수 밖에
힘 뜻 모아 다진 의지
조국의 광복이요
간절히 바란 것은
신사참배 거부운동
산업을 권장하여
나라부강 도모하고
사람들 일깨워서
새론 사람 만들었네
평생에 경영한 일
나라 근본 위함이니
큰 비에 새긴 이름
천년만년 전해가리

서기 2004년 10월
지헌 흥덕 장한수 삼가짓고
학정 영천 이돈흥 삼가쓰다
三月(3월)을 불 밝힌 별
옷 벗은 三月(3월)이 나무가지 우듬지에 새싹을 키울 때 당신은 가슴 열어 太極旗(태극기)를 꺼내고 당신의 가슴에서 만세소리가 터져나왔다 가장 어린 소녀의 소리가 삼천리를 휘감을 때 얼어붙어 퍼어런 하늘이 내려와 춤추고 새 잎 피는 산천초목이 또 다른 만세를 불렀다 아 일어설 수도 외칠 수도 없었던 세월 그러나 일어났다 외쳤다 죽을 힘으로 나아가 넘어뜨렸다 맨손 쥔 태극기가 총칼을 눌렀다 이 땅의 굴레를 온몸으로 벘겼다 강물도 산맥도 따라나선 만세소리 세상천지가 반짝이는 별밭이었다 조국의 새벽을 부르던 당신 압제를 불사르는 閃光(섬광) 같은 당신 채찍이 휘감길수록 만세소리는 되레 아름답고 웅크린 자 망보던 자 기죽어 넘어진 자 興學館(흥학관) 불빛에 모여 독립정신을 가르치니 모두모두 뛰쳐나와 산이 되었다 강이 되고 숲이 되었다 강물은 건너고 산맥은 넘었다 사철 푸른 숲으로 자유자존을 絶(절)매했다 절망과 죽음을 밀쳐내며 만세소리 풀잎에 얹어 손 흔드는 봄 三月(3월) 하늘을 불 밝힌 따뜻한 별 하나 우리들 마음 지도에 별자리로 떠올랐다 이마 환한 꽃등을 켜고 조국의 龍(용)이 되어 昇天(승천)하시다
독립투사 수향 최현숙 여사 탄신 100주년 서거 20주년을 기리며
서기 2004년 4월 2일 문학박사 전동 추모 헌시 석계 장주현 근서
곡만 최현숙(향숙) 여사
해동최씨 고가성 경조 평생 설제형 족친 작리정 환호 후진 영문 교도명 독립투쟁 ○ 옥고 천추불멸 유방명 타계 여금 여사 거 용회 울울 여수오
1984년 7월 25일 남평인 우계 문동길 근만
이 적시는 애국지사(건국포장 850호) 우계 문동길 선생이 최여사의 서거를 애도하여 짖고 학정 이돈흥 원장이 썼다
추진위원장 김상권
獨立鬪士 崔賢淑 秀香 女史 追慕碑(독립투사 최현숙 수향 여사 추모비)
일제의 압제와 속박에 사느니 오히려 대한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열혈을 뿌리자는 기치 아래 광주 3.1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16세의 꽃다운 나이에 모진 옥고를 치르신 고 최현숙여사는 1904년(호적상 1903) 1월 27일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후에 광주읍 양림정 145번지)에서 과수원을 경영하던 부 탐진 최공 명환 선생과 이군분 여사의 2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나셨다. 유시에는 막동 수피아 재학 시는 수향이라는 이름하였으며 정신학교 시절 현숙이라 개명하였다. 최명환 선생은 일제의 강압에도 굴하지 않고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을 정도로 강직하였으나 자녀의 교육에는 다소 개화된 사상을 갖으셨기 때문에 최여사는 수피아여학교를 졸업한 후에 서울 정신여학교에도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여사는 광주 수피아여학교 재학 중 박애순 진신애 선생의 교육과 감화로 대한의 자주독립과 민족의 교육 계몽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통감하고 서울의 3.1독립만세운동 발발 직후 동 선생들의 지휘로 동교생 홍순남 박영자 최경애 양태원 등과 극비리에 태극기를 만들어 시위장소에 운반 은익해두고 거사일인 기미년 3월 10일 오후 3시경 광주교아래에서 운집한 천여명의 군중을 선두지휘하여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작은 장터 서문통 우편국 본정 북문 등지에서 가두시위를 감행하다가 왜경에 체포되었는데 왜경에 체포된 뒤에도 경찰서 전정에서 만세를 고창하였고 일경의 취조 중 당돌하게도 주동자는 나다고 대답하는 등 기개를 보이다가 목봉으로 두부 등을 구타당하는 등 고문을 당하였으며 그 무렵 굴감차랑 검사에 의하여 구속 기소되어 1919년 4월(2년간 집행유예)의 선고를 받으시니 최여사는 광주 3.1의거의 최연소 옥고지사인 것이다. 최여사는 나라가 독립하려면 우매한 백성을 계몽하고 청소년들을 육성하여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1922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후 수피아여학교에서 수
년간 교편을 잡고 조화임(조아라 광주YWCA명예회장의 자)여사등 훌륭한 제자를 배출하고 그 무렵 야간에는 전남민족운동의 본거지였던 광주 서읍 광산정 소재 흥학관에서 야학교사를 하여 수많은 선각자를 배출하였는데 김기권 애국지사 등이 흥학관 출신인 것이다. 1924년말 8월 동아일보 광주지국장이었던 광산김공 용환씨와 결혼하여 동국의 총무 겸 여기자로서 부군과 더불어 언론활동을 하고 부군의 신간회 활동을 비롯하여 독립운동 민족계몽운동을 막후지원하고 아울러 시숙 김용준(1968년 3월 1일 대통령표창 2512호)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여 동인으로 하여금 광주학생운동의 선봉이 되도록 하고 3년동안 동인의 옥고시중을 하였으며 부군이 광주학생의거와 관련하여 학부형회의 임시의장 및 재감학부형회의 상무로서 당시 비공재였던 재판상황을 취재 활동 중 체포되자 여기자로서 민완한 취재 솜씨를 발휘하는 등 광주최초의 여성언론인으로서의 활약도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해방 후에는 부군의 전재동포구제회장의 활동 및 정치활동을 지원하여 1960년 광주 을구에서 민의원으로 당선되게하였고 슬하에 11남매를 훌륭하게 성장시켜 실업 의료 법조 교육 사회사업자 제분야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하게 하셨을뿐만 아니라 의학 공학 행정학 이학 등 박사만도 4명을 배출하는등 다른 어느 애국지사보다도 자녀교육에도 성공을 거둔것이다. 오랬동안 원불교를 통하여 불우시설돕기및 청소년선도및 교화사업에 전념하여 1980년 4월 2일 화타원이라는 법호를 받고1983년 5월 7일 한국일보사 제정 훌륭한 어미니상을 수상되엇으며 동년 10월 10일 자유중국 쌍십절행사에 3.1여성동지회 대표로 참석하고 1984년 3월 1일 전남지사의 감사패를 받았다. 동년 7월 25일 80세를 일기로 타계함에 모교인 수피아여고에서 학교장의 예우를 하였고 1986년 12월 16일 정부에서는 대통령표창 제66603호를 추서하였으니 여사의 일생을 통한 조국광복에의 충절 후세교육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