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광주광역시 광주광역시 남구 중앙로 107번길 15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사람은 생명으로써 보배를 삼는 것이 아니요. 진실로 의기로써 보배를 삼는 것이라. 족히 생명을 버리면서도 굳이 그 의기를 살리는 것이니 그러므로 범상한 사람은 일신의 작은 영행만을 탐하지마는 영명한 사람은 오직 대의에 살고 대의에 죽어 그 이름을 천추에 전하는 것이다. 여기 일생을 조국 수호의 제단에 바친 의병장 남일 심공은 본관이 청송이요. 려말의 절신 둔재 계년의 후예요. 둔운처사 의봉의 장남으로서 고종 6년 을사 서기 1869년 2월 15일에 전남 함평군 월야면 산정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성이 총민하고 재질이 뛰어난 위에 성경과 현전을 배워 충효의 뜻을 깨달아 자기의 갈 길을 정하고 병서와 역학을 읽어 무술의 묘법을 익힘으로써 내일의 국난에 시비하더니 을미년 서기 1895년 일본의 손에 국모가 살해된 뒤 의병운동이 일어났을 때 공은 27세의 청년으로서 비분한 뜻을 참지 못했고 10년이 지난 뒤 이른바 을사매국조약이 체결되자 공은 산업을 폐하고서 오직 왜적을 내쫒고 국권을 되찾기 위한 경론에만 몰두하더니 다시 2년뒤에 정미년에 고종의 폐위와 함께 군대마저 해산되므로 공은 비로소 의병을 일으켜 함평군 신광산중에서 훈련을 거듭하며 각도에 격문을 전하고 왜적을 따르는 빈이배들에게 경유문을 뿌리자 수월동안에 각처로부터 모여든 이병들이 무릇 56백명을 넘었다. 이듬해 무신년 40세되던 해 3월 제1차 강진 오치전투에서 왜적 수십급을 목베고 그로부터 무릇 3년 동안에 전후 15회를 싸웠는데 장흥 곽암과 신풍과 남평 장담원과 거성동과 능주 노구두와 석정과 풍치와 영암 사촌과 나주 반치와 해남 성내와 보성 웅치와 천동 등에서 왜적의 날카롭고 수많은 군대와 마주 싸우며 어느 때는 기이한 계책으로써 또 어느 때는 무서운 담략으로 오직 전승무패한 의병장이요 엄격한 규율 중에서도 언제나 부하와 함께 감고를 같이 했으며 민중을 사랑하고 어루만지므로 누구나 공을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건마는 때는 이미 다되어 쓸어지는 나라를 떠받들 길이 없고 의병해산의 조서까지 내려 사기마저 꺽이므로 공은 앙천호곡하기를 말지 못했었다. 그리다 기유년 8월 26일에 능주 풍치에서 적에게 잡혀 광주감옥에 갇혔으되 왜장을 꾸짖는 늠름한 자세는 자못 태산에 비길만 했고 그해 12월에 대구로 이송되어 왜의 법정에도 대의를 들어 웅변하고 온갓 고난에도 굽히지 않은 기백은 참으로 열일에 견줄만 했으며 마침내 경술년 서기 1910년 2월에 적의 교수대에서 향년 42세로써 태연자약하게 순국하신 완전한 시사여귀의 모습이라. 우리는 오늘 여기 공의 뜻과 행적을 돌에 새겨 길이 전하고 자주독립 노선으로써 우리 민족의 갈 길을 삼으려 한다.
서기 1972년 1월 일 후학 이은상 찬, 신호열 서
의병장 남일 심공 순절비 건립위원회 수
의병장 남일 심공 순절비 건립위원회 수
沈 義將 殉節 碑銘(심의장 순절 비명)
沈 義將 殉節 立 贊助員 芳名碑(심 의장 순절 립 찬조원 방명비)
의병장 남일 임공수택 순절비 건립사실기
조국이 광복됨과 더부러 애국선열을 숭봉하는 사업이 민족정기를 위한 가장 중요한 일의 하나였다. 의병장 남일 심공은 기중의 걸연한 분이라 누구나 다 추모하는 마음 간절했으나 세사다난하여 미처 뜻을 이루지 못하더니 4303년 경술 2월 마침내 거국적으로 유론이 재발하여 순절비건립위원회가 구성되여 관공서 및 각계 유지의 성금으로 3개 성상에 걸쳐 공역을 끝마쳤으니 족히 병○의 불민을 볼 수 있다 하리로다. 부녕이 외람되이 시역의 실무를 담당하여 유종용 김유신 박남순 고몽우 최종욱 등 제씨의 종시 탄로로 극저우성하였으므로 여기 그 전말를 간략히 적고 찬조원의 방명비를 세우는 바이다.
단기 4306년 계축 5월 일 운산 신홍렬 찬병서
의병장 남일 임공수택 순절비 건립사실기
조국이 광복됨과 더부러 애국선열을 숭봉하는 사업이 민족정기를 위한 가장 중요한 일의 하나였다. 의병장 남일 심공은 기중의 걸연한 분이라 누구나 다 추모하는 마음 간절했으나 세사다난하여 미처 뜻을 이루지 못하더니 4303년 경술 2월 마침내 거국적으로 유론이 재발하여 순절비건립위원회가 구성되여 관공서 및 각계 유지의 성금으로 3개 성상에 걸쳐 공역을 끝마쳤으니 족히 병○의 불민을 볼 수 있다 하리로다. 부녕이 외람되이 시역의 실무를 담당하여 유종용 김유신 박남순 고몽우 최종욱 등 제씨의 종시 탄로로 극저우성하였으므로 여기 그 전말를 간략히 적고 찬조원의 방명비를 세우는 바이다.
단기 4306년 계축 5월 일 운산 신홍렬 찬병서
최근에 건립된 광주 남구 구동 21-1 광주공원 내 심사 신동욱 선생 항일사적비
不欺心(불기심)
心史 辛東旭 先生 抗日 事蹟碑(심사 신동욱 선생 항일 사적비)
心史 辛東旭 先生 抗日 事蹟碑(심사 신동욱 선생 항일 사적비)
不欺心(불기심)
心史 辛東旭 先生 抗日 事蹟碑(심사 신동욱 선생 항일 사적비)
心史 辛東旭 先生 抗日 事蹟碑(심사 신동욱 선생 항일 사적비)
일제가 우리 주권을 강탈하고 민족을 억압하는 사태에 직면해서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완인으로 생을 마친 분이 있으니 여기서 태어나 일제의 횡포가 극에 달한 1942년 돌아가신 날까지 올곧게 살았다. 오직 학문에 힘써 당대의 거유인 겸산 이병수 선생의 고제로 송산사에 배향되었다. 시대현실에 고뇌하며 깨달은 바 「불심사」라 세 글자다. 나의 참마음을 잃지 않겠다 함이니 호를 심사라 한 뜻이다. 선생은 실로 선비정신을 온몸으로 실천한 인물이다.
일제는 을사늑약을 강요해서 통감부를 설치하고 군대를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난 바 호남에서는 김태원 심남일 전수용 같은 초야의 영걸들이 앞장섰다. 선생은 이들과 지기상합하여 의논하고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 살림이 거의 탕진되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김공은 전사하고 심공과 전공은 붙잡혀 처형을 당했으며 나라 또한 망했다. 이듬해 1911년 정초에 왜병이 들이닥쳐서 선생과 함께 아우 신동화를 끌어가 장성 헌병대에 구금하였다. 이 형제를 제거하지 않으면 호남의병은 평정될 날이 없다하여 혹독한 형벌을 가해 3개월 갇힌 동안에 기절했다 살아나기 네 차례였다. 5월에는 이른바 은사금 사건이 일어났다. 명망 있는 인사들을 돈으로 회유하는 돈을 단호히 거부해서 구속되어 무한한 고초를 겪었다. 이 삼부자의 사적은 동일궤적이라 하겠다.
선생은 항시 일제 관헌의 감시망을 벗어나지 못했다. 대문에 「요시찰함 要視察函」을 설치하여 외출하려면 신고서를 함에 넣도록 했다. 「나의 자유를 어찌 남에게 맡기랴」하며 선생은 결고 이행하지 않았다. 저들은 감시의 문을 거두지 않고 간혹 생트집을 잡아서 독한 체벌을 가하기도 했다. 앞서 고문의 후유증으로 육신이 망가지는 지경에 이르렀거니와 마침내 정강이가 뒤틀려 안짱다리가 되고 말았다. 「나의 일생은 끓는 물 타는 불을 통과한 듯 싶다」로 술회하기도 했다. 해외의 독립운동에 자금지원을 위해 도내의 부호들에게 밀서를 보내면 대개 선생을 신뢰하여 호응했다. 선생이 돌아가신 그 해 추석날 임방울 명창이 찾아와서 이 어른은 훌륭한 분이다. 지금 이처럼 몸져 누워 계시니 소리로나마 위로해 드리리다 하고 판소리를 날이 중천에 뜨도록 불렀다. 선생의 흐트러짐 없이 올곧은 자세가 명창을 감동시킨 것이다. 이 해 11월 숨을 거두며 마지막 하신 말씀은 창씨개명을 말라였다.
2016년 3.1절을 기해 선생은 독립유공자로 국가포상을 받게되었다. 선생의 마음에 비추어 보면 필시 당연한 도리를 한 한 것이라고 사양하셨을 테지만 그렇기에 더욱 만시지탄이 있다. 일제하의 일상을 떠지나 않으면서 견결히 나의 주체를 지킨 그 자세야말로 고귀하다. 여기 공원에 심사 선생을 기리는 돌을 세우니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표가 될 것이다.
2018년 8월 일 후학 임형택 삼가 짓고 학정 이돈흥 삼가 쓰다
일제는 을사늑약을 강요해서 통감부를 설치하고 군대를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난 바 호남에서는 김태원 심남일 전수용 같은 초야의 영걸들이 앞장섰다. 선생은 이들과 지기상합하여 의논하고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 살림이 거의 탕진되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김공은 전사하고 심공과 전공은 붙잡혀 처형을 당했으며 나라 또한 망했다. 이듬해 1911년 정초에 왜병이 들이닥쳐서 선생과 함께 아우 신동화를 끌어가 장성 헌병대에 구금하였다. 이 형제를 제거하지 않으면 호남의병은 평정될 날이 없다하여 혹독한 형벌을 가해 3개월 갇힌 동안에 기절했다 살아나기 네 차례였다. 5월에는 이른바 은사금 사건이 일어났다. 명망 있는 인사들을 돈으로 회유하는 돈을 단호히 거부해서 구속되어 무한한 고초를 겪었다. 이 삼부자의 사적은 동일궤적이라 하겠다.
선생은 항시 일제 관헌의 감시망을 벗어나지 못했다. 대문에 「요시찰함 要視察函」을 설치하여 외출하려면 신고서를 함에 넣도록 했다. 「나의 자유를 어찌 남에게 맡기랴」하며 선생은 결고 이행하지 않았다. 저들은 감시의 문을 거두지 않고 간혹 생트집을 잡아서 독한 체벌을 가하기도 했다. 앞서 고문의 후유증으로 육신이 망가지는 지경에 이르렀거니와 마침내 정강이가 뒤틀려 안짱다리가 되고 말았다. 「나의 일생은 끓는 물 타는 불을 통과한 듯 싶다」로 술회하기도 했다. 해외의 독립운동에 자금지원을 위해 도내의 부호들에게 밀서를 보내면 대개 선생을 신뢰하여 호응했다. 선생이 돌아가신 그 해 추석날 임방울 명창이 찾아와서 이 어른은 훌륭한 분이다. 지금 이처럼 몸져 누워 계시니 소리로나마 위로해 드리리다 하고 판소리를 날이 중천에 뜨도록 불렀다. 선생의 흐트러짐 없이 올곧은 자세가 명창을 감동시킨 것이다. 이 해 11월 숨을 거두며 마지막 하신 말씀은 창씨개명을 말라였다.
2016년 3.1절을 기해 선생은 독립유공자로 국가포상을 받게되었다. 선생의 마음에 비추어 보면 필시 당연한 도리를 한 한 것이라고 사양하셨을 테지만 그렇기에 더욱 만시지탄이 있다. 일제하의 일상을 떠지나 않으면서 견결히 나의 주체를 지킨 그 자세야말로 고귀하다. 여기 공원에 심사 선생을 기리는 돌을 세우니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표가 될 것이다.
2018년 8월 일 후학 임형택 삼가 짓고 학정 이돈흥 삼가 쓰다
不欺心(불기심)
스스로 참마음 속이지 않고 하늘과 땅에 부끄러움 없이 정의롭게 살아 가리라.
이런 인간자세가 불기심(不欺心)을 크게 깨달은 선생의 뜻이다.
스스로 참마음 속이지 않고 하늘과 땅에 부끄러움 없이 정의롭게 살아 가리라.
이런 인간자세가 불기심(不欺心)을 크게 깨달은 선생의 뜻이다.
광주공원에 이 비석은 그 기념사업회가 심사 선생의 고귀한 단성 丹誠을 새겨 세웠습니다.
심사 신동욱 선생 기념사업회
고문
강동원 고재유 권은희 기용주 김갑제 김경진 김동찬 김동철 김명호 김양균 김영태 김충호 나철주 박광순 박광태 박기오 박석무 박주선 박지원 박태상 박해종 박행보 배만운 송기석 송언종 신극주 신승주 신정훈 신찬우 신호웅 안병욱 안종일 염홍섭 윤장현 윤형식 이개호 이계인 이규형 이돈흥 이명한 이성렬 이수만 이용섭 이용훈 이원송 이정재 이종걸 이해주 임채정 임추섭 임형택 장병완 정동재 정종제
심사 신동욱 선생 기념사업회
고문
강동원 고재유 권은희 기용주 김갑제 김경진 김동찬 김동철 김명호 김양균 김영태 김충호 나철주 박광순 박광태 박기오 박석무 박주선 박지원 박태상 박해종 박행보 배만운 송기석 송언종 신극주 신승주 신정훈 신찬우 신호웅 안병욱 안종일 염홍섭 윤장현 윤형식 이개호 이계인 이규형 이돈흥 이명한 이성렬 이수만 이용섭 이용훈 이원송 이정재 이종걸 이해주 임채정 임추섭 임형택 장병완 정동재 정종제
정진백 정환담 조종진 차호철 천정배 최경환 최은식 최재율 최창규 황영성 김준태
명예회장 윤장현
명예회장 이용섭
회장 김갑제
회원
강대욱 강박원 고병돈 고영석 공병철 공연웅 구선희 권경안 기세락 기우황 기호중 김맘전 김병내 김복남 김봉수 김성민 김연엽 김영웅 김영인 김요왕 김용규 김웅국 김의수 김일웅 김장수 김재영 김종민 김종철 김준태 김중채 김진백 김창훈 김철수 김태수 김태웅 김필배 김하배 김형모 김희을 김희진 김충호 나영균 남상철 노광섭 라갑주 라민규 라영균 라판정 마주현 문대식 문상근 문재석 박경래 박경순 박광식 박기정 박남옥 박병두 박병인 박용화
명예회장 윤장현
명예회장 이용섭
회장 김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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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효 박종영 박찬문 박태근 박현순 박희율 박희의 박화담 백현중 서명원 서정환 선라순 성인섭 송숙란 송시열 송원철 신광남 신기석 신기옥 신기진 신병권 신봉섭 신삼길 신상련 신영관 신영길 신영중 신영채 신옥현 신용태 신인기 신종각 신창열 신형기 신형인 신형철 신홍섭 심란수 심명섭 안기봉 안병오 안성례 안진진오 안판기 안정태 양진우 양철승 염규홍 염금섭 오광교 오인균 우영순 위계평 위유환 위정우 위황량 유만권 유병관 유성한 유안중 유영구 유을렬 유정심 유창재 유청림 유호덕 윤득현 윤성옥 윤앵란 윤용수 윤원호 윤익환 윤장현 윤정호 윤한걸 윤해경 윤현두 윤형문 이게만 이계만 이계선 이계준 이계춘 이관범 이근필 이기현 이기홍 이상배 이석형 이영 이영범 이영복 이영애 이윤행 이은희 이재성 이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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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초손 대규 감읍
2019년 3월 1일
불초손 대규 감읍
2019년 3월 1일
바로 앞에는 심남일 의병장 순절비가 있다.
의병장 심남일 순절비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 50-1-8
관리자 : 광주광역시 광주공원관리사무소
이 비는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수많은 전과를 거두고 순국한 심남일 의병장의 뜻과 행적을 길이 전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심남일(沈守擇, 1871~1910)은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강진, 퇴계원, 남평, 나주 등지의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1909년 5월에는 안규홍(安圭洪) 의병진과 합세하여 일군을 섬멸코자 하였으나, 의병 해산의 조칙이 내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어 1910년 대구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 곳을 찾으신 분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순국선열을 추모하고 주변 정화에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 50-1-8
관리자 : 광주광역시 광주공원관리사무소
이 비는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수많은 전과를 거두고 순국한 심남일 의병장의 뜻과 행적을 길이 전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심남일(沈守擇, 1871~1910)은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강진, 퇴계원, 남평, 나주 등지의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1909년 5월에는 안규홍(安圭洪) 의병진과 합세하여 일군을 섬멸코자 하였으나, 의병 해산의 조칙이 내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어 1910년 대구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 곳을 찾으신 분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순국선열을 추모하고 주변 정화에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義兵將 南一 沈公 殉節碑(의병장 남일 심공 순절비)
義兵將 南一 沈公 殉節碑(의병장 남일 심공 순절비)
사람은 생명으로써 보배를 삼는 것이 아니요. 진실로 의기로써 보배를 삼는 것이라. 족히 생명을 버리면서도 굳이 그 의기를 살리는 것이니 그러므로 범상한 사람은 일신의 작은 영행만을 탐하지마는 영명한 사람은 오직 대의에 살고 대의에 죽어 그 이름을 천추에 전하는 것이다. 여기 일생을 조국 수호의 제단에 바친 의병장 남일 심공은 본관이 청송이요. 려말의 절신 둔재 계년의 후예요. 둔운처사 의봉의 장남으로서 고종 6년 을사 서기 1869년 2월 15일에 전남 함평군 월야면 산정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성이 총민하고 재질이 뛰어난 위에 성경과 현전을 배워 충효의 뜻을 깨달아 자기의 갈 길을 정하고 병서와 역학을 읽어 무술의 묘법을 익힘으로써 내일의 국난에 시비하더니 을미년 서기 1895년 일본의 손에 국모가 살해된 뒤 의병운동이 일어났을 때 공은 27세의 청년으로서 비분한 뜻을 참지 못했고 10년이 지난 뒤 이른바 을사매국조약이 체결되자 공은 산업을 폐하고서 오직 왜적을 내쫒고 국권을 되찾기 위한 경론에만 몰두하더니 다시 2년뒤에 정미년에 고종의 폐위와 함께 군대마저 해산되므로 공은 비로소 의병을 일으켜 함평군 신광산중에서 훈련을 거듭하며 각도에 격문을 전하고 왜적을 따르는 빈이배들에게 경유문을 뿌리자 수월동안에 각처로부터 모여든 이병들이 무릇 56백명을 넘었다. 이듬해 무신년 40세되던 해 3월 제1차 강진 오치전투에서 왜적 수십급을 목베고 그로부터 무릇 3년 동안에 전후 15회를 싸웠는데 장흥 곽암과 신풍과 남평 장담원과 거성동과 능주 노구두와 석정과 풍치와 영암 사촌과 나주 반치와 해남 성내와 보성 웅치와 천동 등에서 왜적의 날카롭고 수많은 군대와 마주 싸우며 어느 때는 기이한 계책으로써 또 어느 때는 무서운 담략으로 오직 전승무패한 의병장이요 엄격한 규율 중에서도 언제나 부하와 함께 감고를 같이 했으며 민중을 사랑하고 어루만지므로 누구나 공을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건마는 때는 이미 다되어 쓸어지는 나라를 떠받들 길이 없고 의병해산의 조서까지 내려 사기마저 꺽이므로 공은 앙천호곡하기를 말지 못했었다. 그리다 기유년 8월 26일에 능주 풍치에서 적에게 잡혀 광주감옥에 갇혔으되 왜장을 꾸짖는 늠름한 자세는 자못 태산에 비길만 했고 그해 12월에 대구로 이송되어 왜의 법정에도 대의를 들어 웅변하고 온갓 고난에도 굽히지 않은 기백은 참으로 열일에 견줄만 했으며 마침내 경술년 서기 1910년 2월에 적의 교수대에서 향년 42세로써 태연자약하게 순국하신 완전한 시사여귀의 모습이라. 우리는 오늘 여기 공의 뜻과 행적을 돌에 새겨 길이 전하고 자주독립 노선으로써 우리 민족의 갈 길을 삼으려 한다.
사람은 생명으로써 보배를 삼는 것이 아니요. 진실로 의기로써 보배를 삼는 것이라. 족히 생명을 버리면서도 굳이 그 의기를 살리는 것이니 그러므로 범상한 사람은 일신의 작은 영행만을 탐하지마는 영명한 사람은 오직 대의에 살고 대의에 죽어 그 이름을 천추에 전하는 것이다. 여기 일생을 조국 수호의 제단에 바친 의병장 남일 심공은 본관이 청송이요. 려말의 절신 둔재 계년의 후예요. 둔운처사 의봉의 장남으로서 고종 6년 을사 서기 1869년 2월 15일에 전남 함평군 월야면 산정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성이 총민하고 재질이 뛰어난 위에 성경과 현전을 배워 충효의 뜻을 깨달아 자기의 갈 길을 정하고 병서와 역학을 읽어 무술의 묘법을 익힘으로써 내일의 국난에 시비하더니 을미년 서기 1895년 일본의 손에 국모가 살해된 뒤 의병운동이 일어났을 때 공은 27세의 청년으로서 비분한 뜻을 참지 못했고 10년이 지난 뒤 이른바 을사매국조약이 체결되자 공은 산업을 폐하고서 오직 왜적을 내쫒고 국권을 되찾기 위한 경론에만 몰두하더니 다시 2년뒤에 정미년에 고종의 폐위와 함께 군대마저 해산되므로 공은 비로소 의병을 일으켜 함평군 신광산중에서 훈련을 거듭하며 각도에 격문을 전하고 왜적을 따르는 빈이배들에게 경유문을 뿌리자 수월동안에 각처로부터 모여든 이병들이 무릇 56백명을 넘었다. 이듬해 무신년 40세되던 해 3월 제1차 강진 오치전투에서 왜적 수십급을 목베고 그로부터 무릇 3년 동안에 전후 15회를 싸웠는데 장흥 곽암과 신풍과 남평 장담원과 거성동과 능주 노구두와 석정과 풍치와 영암 사촌과 나주 반치와 해남 성내와 보성 웅치와 천동 등에서 왜적의 날카롭고 수많은 군대와 마주 싸우며 어느 때는 기이한 계책으로써 또 어느 때는 무서운 담략으로 오직 전승무패한 의병장이요 엄격한 규율 중에서도 언제나 부하와 함께 감고를 같이 했으며 민중을 사랑하고 어루만지므로 누구나 공을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건마는 때는 이미 다되어 쓸어지는 나라를 떠받들 길이 없고 의병해산의 조서까지 내려 사기마저 꺽이므로 공은 앙천호곡하기를 말지 못했었다. 그리다 기유년 8월 26일에 능주 풍치에서 적에게 잡혀 광주감옥에 갇혔으되 왜장을 꾸짖는 늠름한 자세는 자못 태산에 비길만 했고 그해 12월에 대구로 이송되어 왜의 법정에도 대의를 들어 웅변하고 온갓 고난에도 굽히지 않은 기백은 참으로 열일에 견줄만 했으며 마침내 경술년 서기 1910년 2월에 적의 교수대에서 향년 42세로써 태연자약하게 순국하신 완전한 시사여귀의 모습이라. 우리는 오늘 여기 공의 뜻과 행적을 돌에 새겨 길이 전하고 자주독립 노선으로써 우리 민족의 갈 길을 삼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