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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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광주광역시 광산구 왕동 415-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원당명각(元堂影閣)
원당영각은 조선 초기의 무신 오자치의 영각(影閣)이다. 1892년 유림 및 후손에 의하여 건립 되었으며 양평공 오자치의 영정(보물 1190호)을 배정하였으나 현재는 서울 중구 궁중유물전시관에 보관 중이다. 원당영각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원주기둥을 세운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의 한식기와 맞배지붕 건물이다. 1975년에 지붕을 보수했으며 1976년에는 대문을 보수했다.
나주오씨 중조라 할 오자치는 1467년(세조 13년) 이시애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된 인물이다. 이 공으로 당시 세조 임금이 그의 영정을 하사한 것이라 전해 내려온다. 오자치의 행적을 살필 수 있는 기록은 「세조실록」과 「성종실록」에 약간의 내용이 있을 뿐 그 외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오자치의 묘와 영당이 용진산 밑 원당리에 있고 오자치의 묘 옆에 심어져 있는 백일홍은 나라에 슬픈 일이 일어날 때는 꽃이 피지 않는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元堂影閣(원당명각)
시기재(始基齋) - (광주광역시 광산구 왕동 415-1)
이곳 광산구 왕동 산55번지에는 나주오씨 5세 나성군 휘 자치를 위시하여 아드님인 6세 나원군 휘 세훈, 손자인 7세 금양군 휘 겸, 칠송공 휘 인, 증손인 남평공 휘 언후, 참판공 휘 언린 등 제위의 묘소와 영당, 제각, 부조)가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나주오씨 4대 봉군은 금성군, 나성군, 나원군, 금양군 임)
광장에는 나성군의 신도비와 신도비 국한문 번역비, 연혁비 등이 세워져 있으며, 나성군은 나라에서 공신 등에게 봉하는 군호이고, 양평공은 시호이다.
나성군은 조선조 세종 때 당시 나주 삼가리(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삼도)에서 성균진사 금성군휘 신중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조 세조 때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467년(세조 13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워 적개공신에 책록되고 병조참판을 지냈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된 분이다. (조선왕조실록)
3동의 건물은 아래로부터 나성군의 영정(보물 제1190호로 궁중유물 박물관에 위탁 보관 중임)을 모시는 영당, 제각인 시기재, 사당인 부조묘(불천지위) 등이다.
2013. 4. 25.
나주오씨 나성군 (시) 양평공 종중
항일의사 오상열
본관은 나주 호는 의재(義齋)이며 1878년(고종 16) 1월 광산구 명도동 대명마을에서 덕이 있고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 오영근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기개와 도량이 넓고 커서, 국운이 기울고 일본의 압박과 침략이 더해지는 것을 분히 여겨, 일본과 싸워서 나라를 구하겠다는 큰 뜻을 품게 되었다. 비밀리에 화약과 무기를 만들어 의병활동의 기틀을 마련하여, 28세의 젊은 나이로 1906년 10월부터 무력 항일전선에 뛰어 들었다. 1907년부터 함평, 나주, 담양, 광주 등에서 왜적과 대항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적에 비해 무기가 열악하고 병사가 부족하여 결국 1908년 12월 23일 엄동설한에 이곳(임곡 사호치)에서 왜적과 치열히 싸우다 향년 30세의 젊은 나이로 순절하였다.
1907년 10월 15일에 첫 출전하면서 부인 배씨에게 남긴 아래의 시가 의사의 충과 효를 잘 나타내 준다.
吾生未可必(오생미가필) 내 삶을 기필하기 어려우니
須護腹中兒(수호복중아) 모름지기 뱃속에 아이를 잘 보호하시오.
不恨死當死(불한사당사) 마땅한 죽음에 죽는 것은 한이 없으나
親年六十餘(친년육십여) 부모님 연세 예순이 넘으시니 그것만이 마음 걸리네
오성술(吳成述) 의병장
오성술 의병장은 1884년 전남 광산(현재의 광주)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본관은 나주로 본명은 인수, 자를 성술, 호를 죽파라 하였습니다. 참봉이었던 아버지 오영선은 마을에서 상당한 재산을 가진 분으로, 외아들 오성술 의병장은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의거할 것을 결심하여 가산을 정리하고 의병기금을 마련하여 김태원 의병부대에서 활약하였습니다. 1906년 최익현 선생의 구국 의병 항쟁을 주창하는 강회에 참석 의병창의를 결심했다. 귀향한 오성술 은 부친에게 군자금 조달을 요청해 무기를 구입하고 동지 200여 명을 규합 1907년 2월 용진산을 근거지로 의병을 일으켰으며 나주 출신의 의병장 김태원(金泰元) 의병부대와 합진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김태원의 의진은 1908년 1월 창평(昌平)의 무동촌전투(舞童村戰鬪)에서 지휘관 요시다를 비롯해 여러 명을 사살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그해 4월 무등산전투에서 김태원이 죽자 의진을 수습해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1908년부터 의병에 대한 일본군의 대대적 진압 작전이 시작되자, 오성술은 전남 광산군 석면산 전투, 함평군 대명동 전투, 고막원 헌병분파소 습격, 나주시 거성동 전투 등 주로 전라도 지역에서 수많은 유격전을 전개했습니다. 1909년 7월까지 유격전을 통한 의병 투쟁을 벌이던 그는, 나주 용문산에서 '남한 대토벌 작전'을 세우고, 호남의병부대의 진압을 위해 구성된 일본군 영산포 헌병대와 결사항전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8월, 패전과 동시에,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강도죄와 살인죄에, 방화죄까지 덧씌워져 교수형을 선고받았고, 이날 순국했습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국가보훈처는 2000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습니다.
오자치 장군과 용마바위 이야기
옛날에 야생마 한 마리가 마을 일대의 들을 쏘다니며 곡식을 망쳐 놓아 마을 사람들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이에 오자치가 야생마를 잡아 준마로 길들이고 말과 더불어 무술을 닦았다. 하루는 오자치가 마을에서 복룡산을 향해 활을 쏘며 말에게 화살보다 앞서 달리라 명령하였다. 화살과의 경주 후, 산 위에 올라 화살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자 성미가 급한 오자치는 말의 목을 베어 죽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화살이 날아와 말의 허벅지에 박혔다고 한다. 오자치는 자신의 경솔함으로 말을 죽였음을 자책 하며 말과 함께 달리던 황룡강변 부근의 바위에 앉아 애마에게 용서를 빌고, 그 바위를 손으로 깎아 석마를 만들었다고 한다.
용장 오자치: 본관은 나주이며 금성군 오신중(錦城君 吳愼中)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력(勇力)이 절륜(絶倫)하여 같은 나이 또래에서는 감히 당할 자가 없었다. 장성하면서 무예를 닦아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였고 병서(兵書)를 두루 읽어 무장으로서의 자질을 키워나갔으며 나라에서 실시한 무과 시험에 나아가 장원급제하고 주부 벼슬에 올랐다. 세조 13년(1467년) 이시애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며 이 공으로 영정을 하사받아 원당영각에 배정하였으나 현재는 서울 궁중유물전시관에 보관 중이다.
광주 광산구 왕동 415-1 시기재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