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광주광역시 광산구 서봉동 140-19
- 탐방로그
- 김태원 관련 사적지 (5780, 6027, 8319, 8339, 8379, 9220)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김태원 의병장 토굴 400m
300m, 300m, 또 400m
김태원 의병장 토굴 300m
이제까지 올라왔던 능선에서 다른 능선으로 건너가야 했다.
김태원 의병장 토굴 100m
이곳의 GPS상의 주소는 광주 광산구 서봉동 140-19 이다.
구한말 의병 전적지
이 지역은 구한말 의병활동이 가장 치열했던 1906년~1909년 김태원 장군 등 의병들의 활동무대입니다. - 광산구
"국가의 안위가 경각에 있는데 의기 남아가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겠는냐? 진충갈력(盡忠竭力)하는 것이 의(義)에 마땅한 일이요. 창생을 건지는데 뜻이 있을진대, 명예를 위하는 데 있지않다. 병(兵)은 죽을 곳에 웃음을 머금고 돌아가는 것이 옳으리라"
〈김태원 의병장이 동생 김율(金聿)에게 보낸 편지
이 지역은 구한말 의병활동이 가장 치열했던 1906년~1909년 김태원 장군 등 의병들의 활동무대입니다. - 광산구
"국가의 안위가 경각에 있는데 의기 남아가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겠는냐? 진충갈력(盡忠竭力)하는 것이 의(義)에 마땅한 일이요. 창생을 건지는데 뜻이 있을진대, 명예를 위하는 데 있지않다. 병(兵)은 죽을 곳에 웃음을 머금고 돌아가는 것이 옳으리라"
〈김태원 의병장이 동생 김율(金聿)에게 보낸 편지
김태원 의병장 토굴
이곳은 대한제국 시기에 김태원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부대가 일제군경에 맞서 최후의 순간까지 싸운 곳이다. 특히 이곳의 토굴과 바위굴은 김태원 의병장과 의병들이 최후를 맞이한 곳으로 추정되는 전적지이다.
일제에 빼앗긴 국권 회복을 위해 일어난 호남 의병 본부인 호남창의회맹소에 선봉장으로 참여한 김태원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고창 문수사 전투와 무등산 무동촌 전투 등 곳곳에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1908년 4월, 어등산을 근거지로 활약하던 중 일본 군경의 포위 공격을 받아 장시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4월 25일 김태원 장군과 의병 23명(혹은 13명)이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곳은 대한제국 시기에 김태원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부대가 일제군경에 맞서 최후의 순간까지 싸운 곳이다. 특히 이곳의 토굴과 바위굴은 김태원 의병장과 의병들이 최후를 맞이한 곳으로 추정되는 전적지이다.
일제에 빼앗긴 국권 회복을 위해 일어난 호남 의병 본부인 호남창의회맹소에 선봉장으로 참여한 김태원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고창 문수사 전투와 무등산 무동촌 전투 등 곳곳에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1908년 4월, 어등산을 근거지로 활약하던 중 일본 군경의 포위 공격을 받아 장시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4월 25일 김태원 장군과 의병 23명(혹은 13명)이 장렬하게 전사했다.
마당바위 안내판에 토굴 외에 석굴도 있다고 했는데 찾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