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장항동 906
- 탐방로그
- 이가순, 이원재 부자의 농지개척사업으로 고양농지개량조합을 만들었는데, 개척된 땅 중 30만평이 호수공원이 되었으며, 위와 같은 공적을 기리기 위해 호수공원에 기념비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이가순 기념비는 호수공원 한울광장 뒤편에 있는데, 앞면에는 이가순의 공적이 새겨져있으며, 뒷면에는 이가순의 맏아들 이원재의 공적이 새겨져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의사 醫師 이원재 李元載(1886~1950)
이가순의 맏아들로 1886년 5월 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난 뒤, 가난과 굶주림 속에 어머니를 여의였고 스스로 학비를 벌며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1913년 독립운동가 노백린 장군의 딸 숙경과 결혼한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민중의 아픔을 돌보는 의사이자 열정적인 독립운동가요, 사회사업가의 길을 걸었다. 만주 고려병원과 강릉 관동병원을 운영하며 독립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신간회 강릉지회를 조직해 활발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34년부터 고양 능곡에 금강병원을 세우고 말을 타고 다니며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 자신의 재산을 투자하여 아버지와 함께 양수장을 만들고 수로를 조성했다. 1934년 부친이 세상 떠난 뒤에는 막대한 재산을 투자해 고양수리조합을 만들었고 후에 이를 국가에 헌납하였다.
1950년 2월 6일, 64세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고양 군민장 영결식에는 그를 애도하는 만장물결이 오리 길로 이어졌다.
늘 ‘사랑을 베풀며 바르게 살라’던 이원재. 민중을 위한 그의 따뜻한 손길과 그가 만든 물길은 농토의 젖줄로 남아 여전히 우리 속에 살아 있다. 몇 마디 글로 어찌 그를 다 말할 수 있을까 만은 그를 잊지 못하는 고양사람들이 부친 이가순을 기리는 빗돌에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함께 새긴다.
2010. 11. 양곡 이가순 숭모사업회
이가순의 맏아들로 1886년 5월 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난 뒤, 가난과 굶주림 속에 어머니를 여의였고 스스로 학비를 벌며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1913년 독립운동가 노백린 장군의 딸 숙경과 결혼한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민중의 아픔을 돌보는 의사이자 열정적인 독립운동가요, 사회사업가의 길을 걸었다. 만주 고려병원과 강릉 관동병원을 운영하며 독립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신간회 강릉지회를 조직해 활발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34년부터 고양 능곡에 금강병원을 세우고 말을 타고 다니며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 자신의 재산을 투자하여 아버지와 함께 양수장을 만들고 수로를 조성했다. 1934년 부친이 세상 떠난 뒤에는 막대한 재산을 투자해 고양수리조합을 만들었고 후에 이를 국가에 헌납하였다.
1950년 2월 6일, 64세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고양 군민장 영결식에는 그를 애도하는 만장물결이 오리 길로 이어졌다.
늘 ‘사랑을 베풀며 바르게 살라’던 이원재. 민중을 위한 그의 따뜻한 손길과 그가 만든 물길은 농토의 젖줄로 남아 여전히 우리 속에 살아 있다. 몇 마디 글로 어찌 그를 다 말할 수 있을까 만은 그를 잊지 못하는 고양사람들이 부친 이가순을 기리는 빗돌에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함께 새긴다.
2010. 11. 양곡 이가순 숭모사업회
이가순 기념비는 호수공원 한울광장 뒤편에 있다.
양곡 이가순을 기리며 – 양곡 陽谷 李可順 이가순 (1867~1943)
이가순 선생은 1867년 전주이씨 익양군파 12세손 종성과 어머니 해주오씨의 큰아들로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청년시절부터 만주와 연해주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한 선생은 1919년 원산감리교회 장로 시절 "조국을 위해 죽기를 각오하라"는 말로 동지들을 격려하며 3.1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원산에 대성학교와 신간회 지회를 세웠다. 일본의 군국주의정책이 날로 심해지자 민족의 경제적 자립운동에 남은 생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1934년 고양 능곡으로 왔다. 당시 이곳은 한강 물이 수시로 흘러넘치고 가뭄피해 또한 커서 버려진 땅과 같았다. 이를 가슴 아프게 여긴 선생은 의사였던 큰아들 원재의 도움으로 한강물을 끌어올리는 양수장을 세우고 수로를 만들어 이 지역 농민들이 잘 살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1943년 그토록 기다리던 해방을 앞두고 선생은 세상을 떠나셨다. 해방 후 그의 영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 대전 현충원에 안장됐다. 아들 원재는 선생의 뜻을 이어 전 재산들 투자해 고양수리조합을 완성하였고 후일 이를 국가에 헌납하였으니 이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한 삶인가!
선생의 후손들은 사회 각 분야에서 크게 기여하고 있다. 특히 둘째딸 원숙의 자녀 정명화·경화·명훈은 세계적인 음악가로 이름을 빛내고 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어느새 67년, 그 마음 깃든 들녘 물길은 오늘도 유유히 흐르고 선생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은 더욱 깊어지매, 여기 고양사람들이 그를 생각하는 마음을 빗돌에 새겨 오래도록 기리고자 한다.
허춘 짓고 노천 조갑녀 큰글씨 쓰다
양곡 이가순 숭모사업회
이가순 선생은 1867년 전주이씨 익양군파 12세손 종성과 어머니 해주오씨의 큰아들로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청년시절부터 만주와 연해주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한 선생은 1919년 원산감리교회 장로 시절 "조국을 위해 죽기를 각오하라"는 말로 동지들을 격려하며 3.1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원산에 대성학교와 신간회 지회를 세웠다. 일본의 군국주의정책이 날로 심해지자 민족의 경제적 자립운동에 남은 생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1934년 고양 능곡으로 왔다. 당시 이곳은 한강 물이 수시로 흘러넘치고 가뭄피해 또한 커서 버려진 땅과 같았다. 이를 가슴 아프게 여긴 선생은 의사였던 큰아들 원재의 도움으로 한강물을 끌어올리는 양수장을 세우고 수로를 만들어 이 지역 농민들이 잘 살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1943년 그토록 기다리던 해방을 앞두고 선생은 세상을 떠나셨다. 해방 후 그의 영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 대전 현충원에 안장됐다. 아들 원재는 선생의 뜻을 이어 전 재산들 투자해 고양수리조합을 완성하였고 후일 이를 국가에 헌납하였으니 이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한 삶인가!
선생의 후손들은 사회 각 분야에서 크게 기여하고 있다. 특히 둘째딸 원숙의 자녀 정명화·경화·명훈은 세계적인 음악가로 이름을 빛내고 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어느새 67년, 그 마음 깃든 들녘 물길은 오늘도 유유히 흐르고 선생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은 더욱 깊어지매, 여기 고양사람들이 그를 생각하는 마음을 빗돌에 새겨 오래도록 기리고자 한다.
허춘 짓고 노천 조갑녀 큰글씨 쓰다
양곡 이가순 숭모사업회
양곡 이가순을 기리며 – 양곡 陽谷 李可順 이가순 (1867~1943)
이가순 선생은 1867년 전주이씨 익양군파 12세손 종성과 어머니 해주오씨의 큰아들로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청년시절부터 만주와 연해주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한 선생은 1919년 원산감리교회 장로 시절 "조국을 위해 죽기를 각오하라"는 말로 동지들을 격려하며 3.1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원산에 대성학교와 신간회 지회를 세웠다. 일본의 군국주의정책이 날로 심해지자 민족의 경제적 자립운동에 남은 생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1934년 고양 능곡으로 왔다. 당시 이곳은 한강 물이 수시로 흘러넘치고 가뭄피해 또한 커서 버려진 땅과 같았다. 이를 가슴 아프게 여긴 선생은 의사였던 큰아들 원재의 도움으로 한강물을 끌어올리는 양수장을 세우고 수로를 만들어 이 지역 농민들이 잘 살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1943년 그토록 기다리던 해방을 앞두고 선생은 세상을 떠나셨다. 해방 후 그의 영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 대전 현충원에 안장됐다. 아들 원재는 선생의 뜻을 이어 전 재산들 투자해 고양수리조합을 완성하였고 후일 이를 국가에 헌납하였으니 이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한 삶인가!
선생의 후손들은 사회 각 분야에서 크게 기여하고 있다. 특히 둘째딸 원숙의 자녀 정명화·경화·명훈은 세계적인 음악가로 이름을 빛내고 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어느새 67년, 그 마음 깃든 들녘 물길은 오늘도 유유히 흐르고 선생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은 더욱 깊어지매, 여기 고양사람들이 그를 생각하는 마음을 빗돌에 새겨 오래도록 기리고자 한다.
허춘 짓고 노천 조갑녀 큰글씨 쓰다
양곡 이가순 숭모사업회
이가순 선생은 1867년 전주이씨 익양군파 12세손 종성과 어머니 해주오씨의 큰아들로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청년시절부터 만주와 연해주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한 선생은 1919년 원산감리교회 장로 시절 "조국을 위해 죽기를 각오하라"는 말로 동지들을 격려하며 3.1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원산에 대성학교와 신간회 지회를 세웠다. 일본의 군국주의정책이 날로 심해지자 민족의 경제적 자립운동에 남은 생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1934년 고양 능곡으로 왔다. 당시 이곳은 한강 물이 수시로 흘러넘치고 가뭄피해 또한 커서 버려진 땅과 같았다. 이를 가슴 아프게 여긴 선생은 의사였던 큰아들 원재의 도움으로 한강물을 끌어올리는 양수장을 세우고 수로를 만들어 이 지역 농민들이 잘 살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1943년 그토록 기다리던 해방을 앞두고 선생은 세상을 떠나셨다. 해방 후 그의 영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 대전 현충원에 안장됐다. 아들 원재는 선생의 뜻을 이어 전 재산들 투자해 고양수리조합을 완성하였고 후일 이를 국가에 헌납하였으니 이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한 삶인가!
선생의 후손들은 사회 각 분야에서 크게 기여하고 있다. 특히 둘째딸 원숙의 자녀 정명화·경화·명훈은 세계적인 음악가로 이름을 빛내고 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어느새 67년, 그 마음 깃든 들녘 물길은 오늘도 유유히 흐르고 선생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은 더욱 깊어지매, 여기 고양사람들이 그를 생각하는 마음을 빗돌에 새겨 오래도록 기리고자 한다.
허춘 짓고 노천 조갑녀 큰글씨 쓰다
양곡 이가순 숭모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