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제 공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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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계면 봉계리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자고로 선각자란 평상시엔 그 일상이 무위무연이나 일단 유사시엔 공익을 위하여 과감히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상도라 했다. 소강공의 선각자 일생은 그래서 더욱 빛날 것이리라. 공의 휘는 주인(일명 인제)이오, 자는 수여 소강은 자호이다. 공은 극충극효로 만고불멸의 고려 충신 충청도 도관찰사에 형판하신 세칭 상촌선생(휘 자수)의 20대손이오, 조선 중묘 기묘 명현 관리판하신 익문간공(휘 세필) 십청헌 선생의 16대손으로서 양대 후손의 세거지인 치동 구제에서 서기 1881년(신사) 10월 2일 성균생원 낙재공(휘 태로)의 증손으로 휘 경렬(생부 휘 만렬)의 장자로 출생하셨다. 공은 극히 불우한 시대에 태어나셨지만 천성이 총민하셨기에 한사의 일생을 충만하게 살다 가신 분이라 할만하다. 당시만 해도 이미 국토는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어 고종은 주권행사를 제대로 못하고 있을 때였다. 야욕에 찬 도이 일제는 숙적 청국과 노국을 물리치고 각본대로 조국을 강점하여 극히 야만적이고 반인륜적인 식민지
정치로 무려 36년간이나 약탈과 착취를 일 삼았으니 이 민족의 고통이 얼마나 가혹했는지는 불문가지리라. 설상가상으로 오만에 찬 일제의 만행이 자초한 2차 세계대전은 장장 6년만에 그들의 패전으로 막을 내렸지만 이 과중에 우리 민족이 당한 고초는 필설로는 다 할수 없을만큼 극에 달했던 것이었다. 급기야 민초들은 삶의 의욕마저 상실한 채 극도로 타락하여 연일 술과 푼전 놀이로 허탈한 가슴을 달래야만 했다. 무릇 난국의 구휼은 인자의 몫이라했느니. 장기간 고뇌와 숙고에 잠겨있던 선비 소강공은 비장한 각오로 돌연 읽던 책을 덮고 과감히 농민살리기에 앞장 섰다. 공은 평소에 동경하던 실학의 선구자 다산의 목민심서를 거울삼아 최우선으로 방탕생활을 근절하고 수입성이 빠른 가마니 짜기와 양잠을 적극 권장하여 바로 가계에 도움되게 함으로써 근면정신을 함양하고 가구당 매식 절미 일시 운동을 생활화하여 검약정신 및 저축정신을 조장하하고 또 야경반을 조직하여 춘궁기의 도난과 동삼의 화재를 사전에 예방하는 것으로 협동정신을 고취했으며 물산장려책의 일환으로 공예품 품평회를 열어 수작은 시상도 하고 더러는 상품화해서 가용에 보태는 한편 여분은 요긴한 농구로 활용되었으니 의외로 일거삼득의 효과를 얻으므로써 "하면된다"는 강한 자신감을 유발시켰다. 이렇듯 숨가쁘게 추진하신 업적 중 선구적 백미는 역시 교육이었다.
기언략에 "강육강식의 세계에 맞서 나갈 무기는 단연코 교육이라고" 공은 일찍이 서당을 열어 유가문화의 바탕인 한학을 지도하는 한편 문맹퇴치의 일환책으로 개설한 야학운영에도 정신적 후원자가 되어 몽매한 인성을 개도하여 윤상을 체득케하고 삶의 의욕과 질을 높여 드디어 약소민족의 설움을 딛고 궁극적 목표인 자력갱생의 활로를 터득케하였으니 공의 혜안은 이 고장의 영원한 등불이요, 억겁만대 선각자적 표상이 되리라.
공은 오랜 세월 농촌의 빈곤퇴치와 문맹퇴치에 헌신하신 선도자로서 평범을 초월한 값진 인생을 사시다가 서기 1962년(임인) 5월 26일 향년 82수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셨다. 오늘 우리는 공의 빛나는 의적과 유덕을 영세불망코자 지역주민의 뜻을 모아 삼가 공덕비를 건립하도다.
명하여 가로되
400년 뿌리 내린 정겨운 향토 닫힌 문 밝게 열고 미명의 안개 걷고 향촌부흥 문맹퇴치에 몸 바친 일생
숭고한 그 얼 받들어 각석비현 하나이다.

서기 2004년(갑신) 5월 상한 족제 주만 근식
포항시 북구 기계면 봉계리 121-2 치동마을 입구 소강 김인제 선생 공덕비를 찾았다.
김인제 선생 역시 보훈처 공훈록에서는 찾을 수 없고, '포항의 독립운동사'에서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小岡 慶州金公 功德碑(소강 경주김공 공덕비)
小岡 慶州金公 功德碑(소강 경주김공 공덕비)
小岡 慶州金公 功德碑(소강 경주김공 공덕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