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수락리 252-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순절비 아래쪽에 선생이 몸을 던지신 가마소가 있었다.
목산 조선생(조현욱) 순절비
GPS 상의 주소는 경북 청송군 현서면 수락리 252-3이다.
GPS 상의 주소는 경북 청송군 현서면 수락리 252-3이다.
牧山 趙先生 殉節碑(목산 조선생 순절비)
하늘은 닫혀 태양은 빛을 잃어버리고 온겨레는 갈곳몰라 해매고 있을제 이곳 가마소에 한몸던져 꺼져가는 민족정기에 한줄기 횃불이 되신 분이 계시니 이는 목산 조현욱공이시다. 공운 함안조씨이니 단종조 충신인 생육신 어계선생 휘 려의 15대손이며 임란공신 동계공 휘 형도의 10대손이고 사도세자의 변에 감영에서 호곡하여 선비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던 승와공 휘춘경의 5대손으로 1860년 음력 정월 대구 완대동에서 출생하셨으니 아버지는 휘 교화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로 본가인 백부 휘 명화께 양조들었다. 때는 대한제국말년이니 나날이 밀어닥친 외세의 압력과 내정의
혼탁으로 국운은 쇄퇴일로를 걷고 있을제 공은 은든생활을 결심하여 부리던 노비를 모두 풀어주고 청송 보현산아래 소먹이재를 찾아 여생을 보내고져 자리를 잡고 스스로 목산이라 호를하였다. 그러나 1919년(기미년) 망국의 한을 드디어 민족의 울분이 되어 터졌으니 공도 분연히 일어나 동지 조병국, 신태휴와 함께 격문을 돌려 3월 26일 화육장날을 이용하여 일제항거의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으니 수백명의 군중이 공을 따라 노도와 같이 일어났다. 공은 왜경에 잡혀 3년형에 옥고를 치르면서도 의연하게 도해시로 그의 굳은 의지를 보였으니
원래 의리만을 숭상하든 사람이 어찌 하여 하루아침에 오랑캐의 백성이 된단말인가? 하늘의 해도 빛을 잃은 어두운 이땅에서 내 차라리 바다를 밟은지언정 그의 신하는 되지않켔노라 이라 하였으니 꺽지못할 공의 기개와 늠름한 기상을 엿볼수 있다.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더렵혀진 이 강토에서 살아가기엔 공의 지조는 너무나 맑고 깻끗하였으니 드디어는 1922년 음력 2월 19일 이른 새벽 망국의 통한을 큰소리로 외치고 이곳 가마소에 몸을 던져 63세를 일기로 장엄히 일생을 끝마치셨다. 광복후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3.1절에 공을 독립유공자로 수훈하였고 또 청송군민은 성금을 모아 1954년 이곳에 공의 순절비를 신현돈 경북지사의 글로 세웠는데 도로공자로 인해
원래 의리만을 숭상하든 사람이 어찌 하여 하루아침에 오랑캐의 백성이 된단말인가? 하늘의 해도 빛을 잃은 어두운 이땅에서 내 차라리 바다를 밟은지언정 그의 신하는 되지않켔노라 이라 하였으니 꺽지못할 공의 기개와 늠름한 기상을 엿볼수 있다.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더렵혀진 이 강토에서 살아가기엔 공의 지조는 너무나 맑고 깻끗하였으니 드디어는 1922년 음력 2월 19일 이른 새벽 망국의 통한을 큰소리로 외치고 이곳 가마소에 몸을 던져 63세를 일기로 장엄히 일생을 끝마치셨다. 광복후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3.1절에 공을 독립유공자로 수훈하였고 또 청송군민은 성금을 모아 1954년 이곳에 공의 순절비를 신현돈 경북지사의 글로 세웠는데 도로공자로 인해
너머저 1991년 6월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모여 이비를 다시 세우는바이다. 그 할아버지 고사리꺽던 충절이 면면히 어이 맑은 절개는 항일의 횃불이 되어 타오르고 선비의 기백은 총칼잎에서도 늘름하였네. 오랑캐신하되기싫어 고해의 길을 걸었으니 영령은 하늘에서라도 이 강토 이 겨레를 보살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