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묘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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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 76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국가의 건설은 보지 못한 채 1955년 향년 75세로 생애를 끝마치고 말았다. 대한민국정부는 이에 지사의 위공을 기리기 위하여 건국공로포장을 내렸다,
그의 슬하에는 후기 광기 하기 양기 등 사곤계가 있으며 손자로는 후기의 아들인 종신과 광기의 아들인 종소 종진 종인 하기의 아들인 종세 종해 양기의 아들인 종순 등이 있으니 모두 선친과 조부의 독립정신 및 그 유지를 받들고 있는 훌륭한 후예들이다.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문학박사 박영석이 글을 짓고 최병찬은 글씨를 쓰고 국비하사금으로 1987년 4월 5일 이 비를 세우다.
경북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 명대에 있는 매운 이정희 선생 묘소를 찾아왔다.
GPS 상의 주소는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 763이다.
志士 梅雲 鐵城李公 之墓(지사 매운 철성이공 지묘). 철성이공은 고성이공과 같은 뜻이라고 한다.
이정희 지사는 자를 내길 호는 매운이라 하며 본관은 철성이고 양헌공 용헌 원의 후예로 부는 의선이다. 지사가 출생했을 당시는 바로 개항 직후로서 서구 열강과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에 침략의 손길을 뻗치던 때였다. 이처럼 불우한 시대에 태어난 지사는 일제를 몰아내고 주권을 회복하여 근대적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일에 일생을 바쳤다.
지사는 1881년 신사 일월 12일 경북 칠곡군 인동면 신곡리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3세 때 부친을 여의고 외조부 장의원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향리인 청도군 매전면 명대로 이사한 후에는 뜻한바 있어 대구 광명학교에 진학 신학문에 전념하였다. 일제는 서서히 한국을 반식민지화 해갔으며 이러한 과정을 성장하면서 직접 체험하게 된 지사에게는 점차 민족의식이 싹터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이상룡과
박상진을 만나 국권회복을 논의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직접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지사는 그후 구국방략의 일환으로 동지들과 함께 상덕태상회를 조직 독립운동의 거점을 확보하였으며 한미흥업회사를 설립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데에도 노력을 경주하였다. 한편 지사는 안희제의 백산상회를 지원하기도 하고 대한광복회를 조직하는데 있어서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가장 중요한 책임자의 1인으로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지사는 청도청년회장에 추재되기도 하였으며 군자금을 염출하기 위해 광업소를 설립한바 있었다. 1919년에는 대한광복회 독립운동으로 일제에 체포되어 공주감옥에서 8개월여의 옥고를 치루었다.
그후 지사는 후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근대적 학교인 온명학원(후일의 매전국민학교)을 설립하였으며 만주와 중국의 이상룡 노백린 등과 연락을 취하여 의용단 군자금을 조달하고자 노력하던 중 체포되어 다시 3년 8개월의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사는 석방된 후에도 단념하지 않고 동지들과 함께 독립운동의 재기를 꾸준히 논의하였으며 그러던 중 1945년 조국이 광복되자 광복회를 재조직하여 회장직을 맡아 활동을 재개하였다.
지사는 독립운동 뿐만 아니라 영남 유림의 대표가 되어 환국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였으며 반공반탁운동을 전개 신탁반대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또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고문을 역임하였다.
이정희 지사는 조선 후기 외세가 조국을 침략하던 불우한 시기에 태어나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일생을 바쳐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후 조국은 광복이 되었으나 그가 원하던 근대적인 민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