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준 순국비

4

주소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산147
탐방로그
이양준 선생 순국비는 경북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중앙고속도로변에 위치해 있다. 고속도로 옆에 과수원으로 올라가면 중앙고속도로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순국비를 찾을 수 있었다. 이양준 선생 순국비 주변에는 여러 봉분도 함께 찾아볼 수 있었는데, 비석이 있는 묘소는 찾을 수 없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1920년(年) 3월(月) 27일(日) 또한 이곳에서 사랑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품 안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그의 유해(遺骸)는 당시(當時) 적(敵)의 가법(苛法)으로 이곳 공동묘지(共同墓地) 유좌(酉坐)에 묻히었다. 그의 세휘(世諱)는 이양호(李良護)요 양준(良俊)은 그 자(字)다. 이씨(李氏) 원래 계림(鷄林)의 급량부인(及粱部人)으로써 시조(始祖) 알평대인(謁平大人)이 육부족(六部族)을 이끌고 거서간(居西干)을 받들어 신라천년(新羅千年)의 기업(基業)을 열어 고려(高麗)를 거쳐 근세조선(近世朝鮮)에 이르도록 명공거경(名公巨卿)이 잇달았으며, 여말(麗末)에 문정공달충(文靖公達衷)은 문장위망(文章位望)이 일세(一世)에 올렸고 능(能)히 조선태조(朝鮮太祖)를 초래중(草萊中)에 섬발(韱拔)하였으며, 중세(中世)에 다시 남하(南下)하여 이곳에 세거(世居)하였으며, 구계중립(龜溪中立)은 도산(陶山)의 지결(旨訣)을 받아 문학행의(文學行誼)로써 일컬었으니 이 이가 그의 12대조(十二代祖)였다. 세급(世級)이 점점(漸漸) 내려오매 고조(高祖) 득벽(得檗)·증조(曾祖) 장의(章毅)·조(祖) 병천(並天)·고(考) 종도(鍾道)는 다 벼슬하지 않았으며, 외조(外祖)는 영천(永川) 이성수(李成壽)라, 배(配)는 신안(新安) 주씨(朱氏) 전택(銓澤)의 딸로서 자(子) 귀철(貴徹)이요 딸은 백시영(白時榮)에게 시집갔다. 귀철(貴徹)의 자(子) 영길(榮吉)·영환(榮煥)이요 시영(時榮)의 자(子) 창길(昌吉)·창환(昌煥)이요, 다음은 다 어림. 그는 일찍 한학(漢學)을 닦아 충효(忠孝)의 길을 배웠으며, 다시 예수교에 들어 집사(執事)로 되어 불의(不義)에 반항(反抗)하는 푸로테시탄트의 정신(精神)을 받아 항상(恒常) 민족(民族)의 비운(悲運)에 강개(慷慨)하여 민 영환(閔泳煥)·이 준(李儁) 제공(諸公)을 흠모(欽慕)하더니 기미운동(己未運動)에 이르러 드디어 이같이 입접(立節)하였다. 그는 출옥(出獄)의 길에 아들의 났음을 듣고 탄식하기를 “장래(將來) 이류(異類)의 노예(奴隸)로 하기보다 차라리 내손으로 없애버리지”하여 없애려고까지 하였다. 이로써 그의 강렬(强烈)한 항쟁의식(抗爭意識)을 엿볼 수 있다. 귀철(貴徹) 성장(成長)하자 우리 겨레의 광복(光復)이 왔다. 체백(體魄)을 개착(改厝)하려 하나 수심년(數十年) 안치(安置)의 뒤에 차마 천동(遷動)하기 어려워 이에 그 풍렬(風烈)을 추앙(追仰)하는 사회인사(社會人士)와 협의(協議)하여 그 유촉(遺囑)을 돌에 새기려고 불망(不忘)에게 부탁하매 감(敢)히 불문(不文)으로써 벽거(辟拒)하지 못하여 위에 대략(大略) 찬차(撰次)하고 다시 그의 정신(精神)을 노래로써 새기노니
자유(自由)의 터전에 자라 정의(正義)의 길을 예고 박애(博愛)의 전당(殿堂)에 살지니 이 하느님 드리우신 정신(精神)이라 이 정신(精神)에서 살았으며 이 정신(精神)으로 여기에 누웠노라.

주후 1966년 9월

의성군(義城郡) 후원으로 의사(義士) 이양준(李良俊)선생 순국비(殉國碑) 건립 위원회 건비(建碑)

풍산(豊山) 유석우(柳奭佑) 찬문(撰文)
대통령(大統領) 박정희(朴正熙) 서액(書額)
월성(月城) 최상엽(崔相燁) 서음(書陰)
바로 아래 중앙고속도로이다.
이곳의 GPS 상의 주소는 경북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산 147 이다.
경북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중앙고속 도로변에 있는 의사 이양준 선생 순국비를 찾아왔다.
고속도로 옆에 과수원으로 올라가는 입구가 있었다.
묘는 많지만 비석이 있는 묘소를 찾을 수 없었다.
중앙고속도로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순국비가 서 있었다.
義士 李良俊 先生 殉國碑(의사 이양준 선생 순국비)
義士 李良俊 先生 殉國碑(의사 이양준 선생 순국비)
여기에 우리 대한(大韓)의 열사(烈士) 누워 계신다. 그는 겨레에 목숨을 바치었다. 여기에 대한(大韓)의 얼을 보겠다. 때는 1919년(年) 3월(月) 우리 겨레는 총궐기(總蹶起)하여 독립(獨立)을 선포(宣布)하여 침략자(侵略者)에게 맞섰다. 그는 평소 쌓이고 쌓였던 정의감(正義感)과 자유이념(自由理念)과 민족적(民族的) 통분(痛憤)을 금(禁)하지 못하여 감연(敢然)히 동지(同志)들을 규합(糾合)하여 수천 군중(數千群衆)을 움직여 대한 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를 외치고 폭압(暴壓)하는 적경(敵警)의 흉기(凶器) 앞에 맨주먹과 돌맹이로 대항(對抗)하다가 드디어 입은 관통상(貫通傷)과 혹독(酷毒)한 문초(問招)로 인(因)해 얻은 병(病)으로써 적(敵)의 3년 형기(刑期)를 여섯 달 만에 가출옥(假出獄)하게 되고 다시 외로운 병석(病席)에서 비장(悲壯)한 대한 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의 마지막 외침을 남긴 채 1891년(年) 4월(月) 10일(日) 이곳 의성군(義城郡) 안평면(安平面) 대사동(大司洞)에서 태어난 이래 29년간(年間)의 현세 생활(現世生活)을 청산(淸算)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