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260-2
- 탐방로그
- 신돌석 장군의 유적지는 1996년부터 1999년까지 사당(충의사)와 서재, 기념관 등을 세운 것이며 신돌석 생가터와는 약 1.6km 떨어져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신돌석 장군 시비
장산 신돌석 장군 시(將山 申乭石 將軍 詩)
登樓遊子却行路(등루유자각행로) 누각에 오른 나그네 문득 갈 길을 잊은 채
可歎檀墟落木橫(가탄단허락목횡) 단군의 옛 터가 쇠퇴함을 한탄하네
男子二七成何事(남자이칠성하사) 남아 스물일곱 이룬 것이 무엇인가
暫倚秋風感慨生(잠의추풍감개생) 추풍에 의지하니 감개만 솟는구나
이 시비는 2008년 신돌석 장군이 순국한 100주년을 기념하여 장군의 구국정신을 본 받고자 이곳에 시비를 세웠다.
한시는 1904년 되던 해 평해 월송정에 올라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현실을 한탄하며 우국충정의 마음을 읊은 시이다.
1878년 이곳 도곡에서 태어나 1906년 영해를 중심으로 영릉의병을 창의하여 동해안 및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맞서 신출귀몰한 활약으로 혁혁한 전과를 거둔 의병대장이다.
登樓遊子却行路(등루유자각행로) 누각에 오른 나그네 문득 갈 길을 잊은 채
可歎檀墟落木橫(가탄단허락목횡) 단군의 옛 터가 쇠퇴함을 한탄하네
男子二七成何事(남자이칠성하사) 남아 스물일곱 이룬 것이 무엇인가
暫倚秋風感慨生(잠의추풍감개생) 추풍에 의지하니 감개만 솟는구나
이 시비는 2008년 신돌석 장군이 순국한 100주년을 기념하여 장군의 구국정신을 본 받고자 이곳에 시비를 세웠다.
한시는 1904년 되던 해 평해 월송정에 올라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현실을 한탄하며 우국충정의 마음을 읊은 시이다.
1878년 이곳 도곡에서 태어나 1906년 영해를 중심으로 영릉의병을 창의하여 동해안 및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맞서 신출귀몰한 활약으로 혁혁한 전과를 거둔 의병대장이다.
장산 신돌석 장군 시
루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잊은 채 / 단군의 옛 터가 쇠퇴함을 한탄하네 / 남아 스물일곱 이룬 것이 무엇인가 / 추풍에 의지하니 감개만 솟는구나
영릉의병진 창의장 명록
의병진대장 신돌석, 통인 강업이, 집사 이목국 장유락 이원이 이경문, 참모장 박수찬 김병두, 도선봉장 한영육, 분진선봉장 전세호 이현규, 중군장 김용욱, 중군대장 백남수, 좌익대장 이경진 김주태 김형식, 주성대장 강심흠, 현심대장 강경흠, 유격대장 권두용, 도영장 임경호 한용수, 군영장 이윤명 김상필 이대회, 영솔장 김상발 최주형, 교련장 이화진 원세찬 심선순, 군량장 이종근, 좌익장 황만암 박찬, 수위장 임재명, 행진장 이응성, 치테장 이종만 원세엄, 포도장 이술의, 도소모장 김병문, 분진소모장 백하운, 출진소모장 이낙현, 행진소모장 권병로, 수문장 박재복 이천석, 소모장 장영환 원세명 황재성 김형정 최경식 박재하 정비영 원세우 김계동 최기석 김형하 김소○ 김유봉
장산 신돌석 장군 시비 건립기
전면의 한시는 서기 일천구백사년 장산 신돌석 장군이 이십칠세가 되던 해 월송정에 올라 기울어져 가는 조국의 현실을 한탄하며 우국충정의 마음을 읊은 시이다. 장군은 일천팔백칠십팔년 도곡리에서 태어나 의병을 창의하여 동해안 및 태백산맥을 거점으로 일본군과 맞서 신출귀몰한 활약을 펼치며 혁혁한 전과를 거둔 의병대장이다.
우리군은 장군이 순국한 백주년을 기념하여 장군의 혼이 서린 여기에 시비를 세워 장군의 구국정신을 본받고자 한다.
대한민국 광복 육십사년 무자 유월 십삼일
루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잊은 채 / 단군의 옛 터가 쇠퇴함을 한탄하네 / 남아 스물일곱 이룬 것이 무엇인가 / 추풍에 의지하니 감개만 솟는구나
영릉의병진 창의장 명록
의병진대장 신돌석, 통인 강업이, 집사 이목국 장유락 이원이 이경문, 참모장 박수찬 김병두, 도선봉장 한영육, 분진선봉장 전세호 이현규, 중군장 김용욱, 중군대장 백남수, 좌익대장 이경진 김주태 김형식, 주성대장 강심흠, 현심대장 강경흠, 유격대장 권두용, 도영장 임경호 한용수, 군영장 이윤명 김상필 이대회, 영솔장 김상발 최주형, 교련장 이화진 원세찬 심선순, 군량장 이종근, 좌익장 황만암 박찬, 수위장 임재명, 행진장 이응성, 치테장 이종만 원세엄, 포도장 이술의, 도소모장 김병문, 분진소모장 백하운, 출진소모장 이낙현, 행진소모장 권병로, 수문장 박재복 이천석, 소모장 장영환 원세명 황재성 김형정 최경식 박재하 정비영 원세우 김계동 최기석 김형하 김소○ 김유봉
장산 신돌석 장군 시비 건립기
전면의 한시는 서기 일천구백사년 장산 신돌석 장군이 이십칠세가 되던 해 월송정에 올라 기울어져 가는 조국의 현실을 한탄하며 우국충정의 마음을 읊은 시이다. 장군은 일천팔백칠십팔년 도곡리에서 태어나 의병을 창의하여 동해안 및 태백산맥을 거점으로 일본군과 맞서 신출귀몰한 활약을 펼치며 혁혁한 전과를 거둔 의병대장이다.
우리군은 장군이 순국한 백주년을 기념하여 장군의 혼이 서린 여기에 시비를 세워 장군의 구국정신을 본받고자 한다.
대한민국 광복 육십사년 무자 유월 십삼일
西齋(서재)
東齋(동재)
忠義祠(충의사)
殉國義士 申乭石 將軍 紀念碑(순국의사 신돌석 장군 기념비)
순국의사 신돌석 장군 기념비는 경상북도 독립유공자선열유족회 의병대장 신돌석장군기념사업회에서 1965년 7월에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우곡리(호호대.솔동산)에 건립한 것을 이곳 유적지 성역화 지역으로 1999년 11월 18일에 이건하였다.
1999년 11월 18일
신돌석장군유적지 성역화사업 추진위원회
영덕군수
1999년 11월 18일
신돌석장군유적지 성역화사업 추진위원회
영덕군수
殉國義士 申乭石 將軍 紀念碑(순국의사 신돌석 장군 기념비)
태백의 묏부리가 동해에 부딪쳐 이 땅에 한 영웅이 되셨도다. 근세 조선의 국운이 다한 무렵 나라와 겨레를 건지려고 몸을 바쳐 원수를 무찌르다가 원통히 가셨으니 이분이 곧 신돌석(申乭石) 장군이다.
장군의 본 이름은 태호(泰浩)요 자는 순경(舜卿)이며 돌석은 그의 아명이다. 1878년 동짓달 초사흘날 이곳 영해 땅 복평리에서 나시니 고려 충신 장절공의 후예요 신석주(申錫柱)님의 아드님이다. 장군은 절세의 용맹과 세상을 휘덮을 기백을 타고났으니 때는 바야흐로 나라의 기운이 기울어지고 겨레의 빛이 저물어 갈 무렵이나 가슴에 서리는 의분을 가눌 길이 없어 낮으로는 글방에서 책을 들고 나라를 근심했으며 밤이면 왓능에 올라 칼을 휘두르며 겨레의 원수를 노렸다. 때에 왜적의 야욕은 날로 두드러져
장군의 본 이름은 태호(泰浩)요 자는 순경(舜卿)이며 돌석은 그의 아명이다. 1878년 동짓달 초사흘날 이곳 영해 땅 복평리에서 나시니 고려 충신 장절공의 후예요 신석주(申錫柱)님의 아드님이다. 장군은 절세의 용맹과 세상을 휘덮을 기백을 타고났으니 때는 바야흐로 나라의 기운이 기울어지고 겨레의 빛이 저물어 갈 무렵이나 가슴에 서리는 의분을 가눌 길이 없어 낮으로는 글방에서 책을 들고 나라를 근심했으며 밤이면 왓능에 올라 칼을 휘두르며 겨레의 원수를 노렸다. 때에 왜적의 야욕은 날로 두드러져
이참에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날 제 장군은 곧 붓을 던지고 김하락(金河洛) 의병진의 중군장이 되니 그해가 1896년이요 장군의 나이 열아홉이었다. 그때부터 장군의 생애는 오로지 조국과 백성을 위한 가시밭길이었으니 그 진영이 흩어진 후 장군은 동지를 찾고 뒷날의 큰일을 위하여 천하를 두루 다녔다. 박상진 의사와는 죽음의 맹세로 손을 잡았고 이강년 장군과 피로써 이 강토를 구하자고 다짐을 했다.
1906년 3월 장군은 드디어 횃불을 들었도다. 삼백여명의 동지들이 장군의 깃발 아래 모여 들고 장군은 전 가산을 던져 무기와 군자를 마련했다. 그로부터 만 삼년 장군의 깃발이 가는 곳마다 왜적은 쓰러지고 그들의 소굴은 무너졌다. 겨레를 팔아먹는 도적의 앞잡이를 꾸짖고 원통한 백성을 달래었다. 장군의 군세는 삼천명에 이르렀고 그의 호령은 경상, 강원, 충청의 세 땅을 울리었다. 남으로 동내산에서 북으로는 대덕산과 멀리 간성땅에 이르기까지 이십여 고을에서 왜병의 분파소를 부수고 수십번의 싸움에서 적도를 무찔렀다.
그러나 하늘은 끝내 이 나라를 버렸으며 우리의 장군도 앗아가고 말았다. 1908년 겨울 장군은 잠시 싸움을 잊고 군사를 흩어 후일을 기약하던 중 원통하도다. 그해 동짓달 열여드렛날 간악한 무리에게 속아 세상을 떠나시니 영덕 땅 지품면 누루실 골짜기 서른한 살의 푸른 별이 지던 밤 동해의 물결도 노여워 아우성쳤으며 태백의 산줄기도 원통해 울었으리라.
1906년 3월 장군은 드디어 횃불을 들었도다. 삼백여명의 동지들이 장군의 깃발 아래 모여 들고 장군은 전 가산을 던져 무기와 군자를 마련했다. 그로부터 만 삼년 장군의 깃발이 가는 곳마다 왜적은 쓰러지고 그들의 소굴은 무너졌다. 겨레를 팔아먹는 도적의 앞잡이를 꾸짖고 원통한 백성을 달래었다. 장군의 군세는 삼천명에 이르렀고 그의 호령은 경상, 강원, 충청의 세 땅을 울리었다. 남으로 동내산에서 북으로는 대덕산과 멀리 간성땅에 이르기까지 이십여 고을에서 왜병의 분파소를 부수고 수십번의 싸움에서 적도를 무찔렀다.
그러나 하늘은 끝내 이 나라를 버렸으며 우리의 장군도 앗아가고 말았다. 1908년 겨울 장군은 잠시 싸움을 잊고 군사를 흩어 후일을 기약하던 중 원통하도다. 그해 동짓달 열여드렛날 간악한 무리에게 속아 세상을 떠나시니 영덕 땅 지품면 누루실 골짜기 서른한 살의 푸른 별이 지던 밤 동해의 물결도 노여워 아우성쳤으며 태백의 산줄기도 원통해 울었으리라.
거룩한 그 이름 신돌석 장군. 우리는 여기에 장군의 이름을 새기고 다시 부르노라. 온 겨레가 함께 부르고 받들 것이요. ○○ 후손이 길이 외치고 모시리니.
장군이시여. 그리고 장군 및 함께 피 흘려 싸우신 수많은 용사들이여. 길이 이 곳에 계시어 이 바다와 산과 들을 지켜 주시옵소서.
서기 1965년 7월 일 정휘창 글을 짓고 이영달 앞을 쓰고 정희영 뒤를 쓰고
정부 독립 유공 선열 유족회와 의병대장 신돌석 장군 기념 사업회는 세우다.
장군이시여. 그리고 장군 및 함께 피 흘려 싸우신 수많은 용사들이여. 길이 이 곳에 계시어 이 바다와 산과 들을 지켜 주시옵소서.
서기 1965년 7월 일 정휘창 글을 짓고 이영달 앞을 쓰고 정희영 뒤를 쓰고
정부 독립 유공 선열 유족회와 의병대장 신돌석 장군 기념 사업회는 세우다.
義兵大將 申公 遺墟碑(의병대장 신공 유허비)
의병대장 신공 유허비는 장군의 제 신태범이 각처에서 모금하여 1948년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528(복두산 기슭)에 건립한 것을 이곳 유적지 성역화 지역으로 1999년 11월 18일에 이건하였다.
1999년 11월 18일
신돌석장군유적지 성역화사업 추진위원회
영덕군수
1999년 11월 18일
신돌석장군유적지 성역화사업 추진위원회
영덕군수
紀念館(기념관)
성역화지역 일대 유적
생가, 기념관과 사당, 신돌석 묘터, 거병지점, 상원마을 앞 숲(의병훈련장소), 육이당, 고래산
생가, 기념관과 사당, 신돌석 묘터, 거병지점, 상원마을 앞 숲(의병훈련장소), 육이당, 고래산
신돌석 장군은 누구인가?
한국독립운동사(1894-1945)에서 첫 머리를 장식한 것이 의병항쟁이다. 신돌석 장군(1878-1908)은 1896년 전기의병에 18세 나이로 참전하였고, 1906년 4월부터 1908년 12월까지 3년 8개월 동안 영릉의진을 이끌고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순국하였다. 그는 평민 출신 의병장으로 한국사의 발전적인 면모를 보였고, 신출귀몰한 투쟁을 벌여 일본군을 두려움에 몰아 넣었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끈질기고 치열한 전투를 벌인 의병장으로 평가되는 신장군, 그래서 태백산 호랑이"라는 이름이 썩 어울린다.
한국 독립 운동사
1876 강화도 조약 맺음
1882 임오군란
1884 갑신정변
1894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갑오의병의 시작
1895 을미사변
1896 독립협회 설립, 아관파천
1897 대한제국 성립
1904 한·일 의정서 맺음
1905 을사조약
1906 통감부 설치
1907 신민회 설립, 국채 보상 운동, 헤이그 특사 파견, 고종 황제 퇴위, 군대해산
1908 의병- 서울 진공 작전
1910 국권피탈
1919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920 봉오동·청산리 대첩
1926 6·10 만세 운동
1927 신간회 결성
1929 광주학생항일운동
1940 한국 광복군 결성
1942 조선어학회 사건
1945 8·15 광복
신돌석 장군의 생애
1878 11월 3일 축산면 도곡리에서 출생
1896 김하락의 진과 남천쑤 공격에 가담
1902 한재여(韓在汝)와 결혼
1904 외아들 만이(萬伊) 출생, 월송정에서 시 「우국(憂國)」을 읊음
1906 4월 6일 영릉의병(寧陵義兵) 일으키다
4월 30일 영양 관아 공격
5월 25일 청송군 진보면 우편소 탈취
6월초 울진관아 공격, 장호동 공격
6월 14일 평해에서 대구진위대와 접전
6월 25일 영해읍성 점령
7월 3일 영덕읍성 공격
9월 18일 영양군 관아 순교청을 공격
11월 4일 영양군 관아 순교청을 재공격
1월 청송군 이전평(梨田坪)도착, 동대산(경주와 영덕의 경계) 전투
1907 1월 2일 울진군 공격, 우편 취급소 습격, 희암곡 주둔
8월 21일 영덕읍 공격
9월 7일 장호동 2차 공격, 일본군 토벌대와 접전
10월 12일 영해읍내 공격
11월 봉화·순흥 공격
1908 1월 10일 장파에서 안동수비대의 공격을 받음, 독곡으로 이동
2월 '신돌석 생포 작전'을 따돌림
3월 한씨부인을 이용한 일본군의 회유작전을 물리침
4월 평해·진보·영해 등지에서 자금확보
5월 30일 울진·평해 공격
7월 석보·울진·진보에서 활약
9월 새로운 방향 모색(만주로 망명계획)
12월 12일 영덕군 지품면 눌곡 웃마(상계)에서 순국
한국독립운동사(1894-1945)에서 첫 머리를 장식한 것이 의병항쟁이다. 신돌석 장군(1878-1908)은 1896년 전기의병에 18세 나이로 참전하였고, 1906년 4월부터 1908년 12월까지 3년 8개월 동안 영릉의진을 이끌고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순국하였다. 그는 평민 출신 의병장으로 한국사의 발전적인 면모를 보였고, 신출귀몰한 투쟁을 벌여 일본군을 두려움에 몰아 넣었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끈질기고 치열한 전투를 벌인 의병장으로 평가되는 신장군, 그래서 태백산 호랑이"라는 이름이 썩 어울린다.
한국 독립 운동사
1876 강화도 조약 맺음
1882 임오군란
1884 갑신정변
1894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갑오의병의 시작
1895 을미사변
1896 독립협회 설립, 아관파천
1897 대한제국 성립
1904 한·일 의정서 맺음
1905 을사조약
1906 통감부 설치
1907 신민회 설립, 국채 보상 운동, 헤이그 특사 파견, 고종 황제 퇴위, 군대해산
1908 의병- 서울 진공 작전
1910 국권피탈
1919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920 봉오동·청산리 대첩
1926 6·10 만세 운동
1927 신간회 결성
1929 광주학생항일운동
1940 한국 광복군 결성
1942 조선어학회 사건
1945 8·15 광복
신돌석 장군의 생애
1878 11월 3일 축산면 도곡리에서 출생
1896 김하락의 진과 남천쑤 공격에 가담
1902 한재여(韓在汝)와 결혼
1904 외아들 만이(萬伊) 출생, 월송정에서 시 「우국(憂國)」을 읊음
1906 4월 6일 영릉의병(寧陵義兵) 일으키다
4월 30일 영양 관아 공격
5월 25일 청송군 진보면 우편소 탈취
6월초 울진관아 공격, 장호동 공격
6월 14일 평해에서 대구진위대와 접전
6월 25일 영해읍성 점령
7월 3일 영덕읍성 공격
9월 18일 영양군 관아 순교청을 공격
11월 4일 영양군 관아 순교청을 재공격
1월 청송군 이전평(梨田坪)도착, 동대산(경주와 영덕의 경계) 전투
1907 1월 2일 울진군 공격, 우편 취급소 습격, 희암곡 주둔
8월 21일 영덕읍 공격
9월 7일 장호동 2차 공격, 일본군 토벌대와 접전
10월 12일 영해읍내 공격
11월 봉화·순흥 공격
1908 1월 10일 장파에서 안동수비대의 공격을 받음, 독곡으로 이동
2월 '신돌석 생포 작전'을 따돌림
3월 한씨부인을 이용한 일본군의 회유작전을 물리침
4월 평해·진보·영해 등지에서 자금확보
5월 30일 울진·평해 공격
7월 석보·울진·진보에서 활약
9월 새로운 방향 모색(만주로 망명계획)
12월 12일 영덕군 지품면 눌곡 웃마(상계)에서 순국
의병전쟁시 의병과 일본군의 무기
의병전쟁시 의병들은 대부분은 총을 휴대하였고, 일부가 도검이나 창을 사용하였다. 총은 화승총 내지는 이를 개조한 뇌관식총을 사용하였으며, 이외에도 스나이더, 레밍턴, 모젤, 마티니, 무라타 소총 등의 근대식 소총을 사용하였다. 이들 근대식 소총은 관군이나 일본군으로부터 획득한 것이었고, 일부는 자체 제작한 것도 있었다. 이에 비해 일본군은 매우 발전한 화기를 사용하였는데, 독자적으로 개발한 13년식 무라타소총을 비롯하여 이를 개량한 여러종류의 근대식 화기를 사용하였다. 특히 일본군은 기관총과 사거리 10,000m의 야포를 보유함으로써 전투시 화력의 우위를 점하였다.
▷ 의병
화승총(火繩銃) : 구경 15-20㎜ 전장 112-140㎝ 중량 3.6㎏-5.4㎏ 유효사거리 70-100m
천보총(千步銃) : 천보총은 숙종때 박영준(朴英俊)이 개발(사거리 900보). 의병들이 사용한 천보총은 이를 개량한 총으로 뇌관식총이며, 납철환(鑞鐵丸) 사용(사거리가 천보가 넘는다 하여 천보총)
스나이더 소총(Snider) : 전장 123.2㎝ 중량 4.765㎏ 구경 14mm 후장식(後裝式) 약협총(藥莢銃)
레밍턴 소총(Remington) : Model 1863 "Zouave Rifle" 구경 0.58인치(13.7㎜) 총신장 33인치 (83.82㎝) 단발형
모젤소총(Mauser) : M71 구경 11㎜ 전장 134.5㎝ 중량 4.54㎏ 탄창수 1발, M71/84 구경 11㎜ 전장 129㎝ 중량 5㎏ 탄창수 8발, M88 구경 8㎜ 전장 124.5㎝ 중량 3.8㎏ 탄창수 5발
마티니 소총(Martini-Henry) : 구경 0.45인치 전장 125.7㎝ 중량 4.082kg 탄창수 단발
▷ 일본군
13년식 무라 소총 : 구경 11㎜ 길이 129.4㎝ 4.89kg 최대사거리 2.400m
18년식 무라타 소총 : 구경 11㎜ 전장 127.8㎝ 중량 4.098kg 장탄수 단발
30년식 무라타 소총 : 구경 6.5㎜ 길이 127.5㎝ 중량 3.850kg 유효사거리 360m 탄창수 5발 발사속도 8-10발/분
30년식 무라타 기총 : 구경 6.5㎜ 길이 96.5㎝ 중량 3.280kg 탄창수 5발
38식 소총 : 구경 6.5㎜ 길이 127.5㎝ 중량 3.95kg 탄창수 5발
38식 기총 : 구경 6.5㎜ 전장 112㎝ 중량 3.775kg 탄창수 5발
의병전쟁시 의병들은 대부분은 총을 휴대하였고, 일부가 도검이나 창을 사용하였다. 총은 화승총 내지는 이를 개조한 뇌관식총을 사용하였으며, 이외에도 스나이더, 레밍턴, 모젤, 마티니, 무라타 소총 등의 근대식 소총을 사용하였다. 이들 근대식 소총은 관군이나 일본군으로부터 획득한 것이었고, 일부는 자체 제작한 것도 있었다. 이에 비해 일본군은 매우 발전한 화기를 사용하였는데, 독자적으로 개발한 13년식 무라타소총을 비롯하여 이를 개량한 여러종류의 근대식 화기를 사용하였다. 특히 일본군은 기관총과 사거리 10,000m의 야포를 보유함으로써 전투시 화력의 우위를 점하였다.
▷ 의병
화승총(火繩銃) : 구경 15-20㎜ 전장 112-140㎝ 중량 3.6㎏-5.4㎏ 유효사거리 70-100m
천보총(千步銃) : 천보총은 숙종때 박영준(朴英俊)이 개발(사거리 900보). 의병들이 사용한 천보총은 이를 개량한 총으로 뇌관식총이며, 납철환(鑞鐵丸) 사용(사거리가 천보가 넘는다 하여 천보총)
스나이더 소총(Snider) : 전장 123.2㎝ 중량 4.765㎏ 구경 14mm 후장식(後裝式) 약협총(藥莢銃)
레밍턴 소총(Remington) : Model 1863 "Zouave Rifle" 구경 0.58인치(13.7㎜) 총신장 33인치 (83.82㎝) 단발형
모젤소총(Mauser) : M71 구경 11㎜ 전장 134.5㎝ 중량 4.54㎏ 탄창수 1발, M71/84 구경 11㎜ 전장 129㎝ 중량 5㎏ 탄창수 8발, M88 구경 8㎜ 전장 124.5㎝ 중량 3.8㎏ 탄창수 5발
마티니 소총(Martini-Henry) : 구경 0.45인치 전장 125.7㎝ 중량 4.082kg 탄창수 단발
▷ 일본군
13년식 무라 소총 : 구경 11㎜ 길이 129.4㎝ 4.89kg 최대사거리 2.400m
18년식 무라타 소총 : 구경 11㎜ 전장 127.8㎝ 중량 4.098kg 장탄수 단발
30년식 무라타 소총 : 구경 6.5㎜ 길이 127.5㎝ 중량 3.850kg 유효사거리 360m 탄창수 5발 발사속도 8-10발/분
30년식 무라타 기총 : 구경 6.5㎜ 길이 96.5㎝ 중량 3.280kg 탄창수 5발
38식 소총 : 구경 6.5㎜ 길이 127.5㎝ 중량 3.95kg 탄창수 5발
38식 기총 : 구경 6.5㎜ 전장 112㎝ 중량 3.775kg 탄창수 5발
호랑이 쓰러지다
순국장소
지품면 눌곡마을과 황곡마을을 지나자마자 오른쪽 골짜기를 오르면 웃마 (상계)라는 마을터로 향하는 개울을 만난다. 10분쯤 올라가면 서너채의 집터를 발견할 수 있고, 일본헌병의 조사기록 그대로 집터로부터 300m 정도 내려오면 두 사람이 누울 만한 바위가 개울에 엎드려 있다. 어떤 사람은 신장군이 최후를 맞은 곳이 붉은 바위라고, 또 다른 사람은 청석 바위라고 엇갈리게 증언했다. 그런데 현장의 바위는 청석인데 위로부터 철분이 흘러들어 윗면이 붉게 물들어 있는 넓다란 청석이다.
신장군 시신 확인장소
신장군의 휘하에서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10년 유형에 처해져 있던 백남수 를 불러 시신을 확인하였다. (현재 영덕군청 내 서쪽 주차장 자리이다)
- 영덕 헌병분견소 자리
신장군 묘소와 부인 묘소
박은식의 평가
"영해에서 봉기한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 의병부대가 일월산과 백암산을 근거지로 의병부대의 규모를 강화하며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일 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 之血史)〉
- 서울 국립묘지 애국자묘역에 있는 신장군 묘소, 영양군 석보면 화매 포산에 있는 부인 묘소
순국장소
지품면 눌곡마을과 황곡마을을 지나자마자 오른쪽 골짜기를 오르면 웃마 (상계)라는 마을터로 향하는 개울을 만난다. 10분쯤 올라가면 서너채의 집터를 발견할 수 있고, 일본헌병의 조사기록 그대로 집터로부터 300m 정도 내려오면 두 사람이 누울 만한 바위가 개울에 엎드려 있다. 어떤 사람은 신장군이 최후를 맞은 곳이 붉은 바위라고, 또 다른 사람은 청석 바위라고 엇갈리게 증언했다. 그런데 현장의 바위는 청석인데 위로부터 철분이 흘러들어 윗면이 붉게 물들어 있는 넓다란 청석이다.
신장군 시신 확인장소
신장군의 휘하에서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10년 유형에 처해져 있던 백남수 를 불러 시신을 확인하였다. (현재 영덕군청 내 서쪽 주차장 자리이다)
- 영덕 헌병분견소 자리
신장군 묘소와 부인 묘소
박은식의 평가
"영해에서 봉기한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 의병부대가 일월산과 백암산을 근거지로 의병부대의 규모를 강화하며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일 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 之血史)〉
- 서울 국립묘지 애국자묘역에 있는 신장군 묘소, 영양군 석보면 화매 포산에 있는 부인 묘소
신돌석 장군 유적지
신돌석 장군 유적지 / 申乭石 將軍 遺跡地
우리나라가 일제의 침략에 짓밟혀 갈 때, 나라와 겨레를 구하기 위하여 '항일'의 깃발을 높이 세운 분이 있었으니, 바로 신돌석(申乭石) 의병장(義兵將)이었다.
1878년 11월 3일 이곳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서 태어난 장군의 본명은 태호(泰鎬), 어릴때 이름이 돌석이었다.
용맹과 기백을 타고난 장군은 1896년 경기도 광주의 김하락(金河洛) 의병부대가 이곳 영덕으로 이동해 오자, 18세의 어린 나이에 이미 중군장(中軍將)으로 참전하여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뛰어난 힘을 발휘하였다.
을사조약이 강제로 맺어지자, 장군은 1906년 3월에 영해지역의 청년들을 모아 영릉의병진(寧陵義兵陣)을 조직하고 본격적으로 일본군 토벌에 나섰다. 2년 8개월 동안 청하·영덕·영해·청송 ·울진·의성·영양·봉화·삼척·강릉 등지를 오르내리며 수많은 전투를 전개하였으니, 일본군은 장군을 '태백산 호랑이'라 부르며 두려워 하였다.
1908년 12월에 엄동설한 추위를 앞두고 의병진을 일단 해산시킨 장군은 활동무대를 만주로 옮기고자 계획하던 중, 그 달 12일에 일제의 앞잡이에 의해 영덕군 지품면 눌곡리에서 살해되었다. 장군은 30년 짧은 생애 가운데 청년시대 12년을 의병항쟁에 몸 바쳤고, 오직 민족을 위해 살다 갔다.
우리 정부는 장군의 공을 기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고, 1971년 국립묘지 유공자 묘역에 그를 안장하였다.
그리고 영덕군과 국가보훈처는 장군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탄생지인 이곳을 성역화(聖域化)하기로 결정하고, 1996년 12월부터 1999년 11월까지 사당(祠堂) 1동,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각 1동, 기념관 1동을 세웠다. 이곳을 찾는 사람마다 장군의 뜻을 헤아리고 나라와 겨레를 생각하기 바란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침략에 짓밟혀 갈 때, 나라와 겨레를 구하기 위하여 '항일'의 깃발을 높이 세운 분이 있었으니, 바로 신돌석(申乭石) 의병장(義兵將)이었다.
1878년 11월 3일 이곳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서 태어난 장군의 본명은 태호(泰鎬), 어릴때 이름이 돌석이었다.
용맹과 기백을 타고난 장군은 1896년 경기도 광주의 김하락(金河洛) 의병부대가 이곳 영덕으로 이동해 오자, 18세의 어린 나이에 이미 중군장(中軍將)으로 참전하여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뛰어난 힘을 발휘하였다.
을사조약이 강제로 맺어지자, 장군은 1906년 3월에 영해지역의 청년들을 모아 영릉의병진(寧陵義兵陣)을 조직하고 본격적으로 일본군 토벌에 나섰다. 2년 8개월 동안 청하·영덕·영해·청송 ·울진·의성·영양·봉화·삼척·강릉 등지를 오르내리며 수많은 전투를 전개하였으니, 일본군은 장군을 '태백산 호랑이'라 부르며 두려워 하였다.
1908년 12월에 엄동설한 추위를 앞두고 의병진을 일단 해산시킨 장군은 활동무대를 만주로 옮기고자 계획하던 중, 그 달 12일에 일제의 앞잡이에 의해 영덕군 지품면 눌곡리에서 살해되었다. 장군은 30년 짧은 생애 가운데 청년시대 12년을 의병항쟁에 몸 바쳤고, 오직 민족을 위해 살다 갔다.
우리 정부는 장군의 공을 기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고, 1971년 국립묘지 유공자 묘역에 그를 안장하였다.
그리고 영덕군과 국가보훈처는 장군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탄생지인 이곳을 성역화(聖域化)하기로 결정하고, 1996년 12월부터 1999년 11월까지 사당(祠堂) 1동,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각 1동, 기념관 1동을 세웠다. 이곳을 찾는 사람마다 장군의 뜻을 헤아리고 나라와 겨레를 생각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