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420
- 탐방로그
- 애국지사 함양박공 3형제인 박의연(박건), 박의열, 박의훈 삼형제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이다. 한 집의 삼형제가 모두 만주로 망명하여 일생을 조국 광복을 위해 투쟁하였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애국지사 함양박공 의연·의열·의훈 사적비 - 국가보훈처지정 현충시설
◆ 관리번호: 33-1-6
◆ 관리자: 애국지사함양박씨 문중대표
◆ 위치: 영덕군 창수면 인량2리 420
이 사적비는 영덕이 낳은 한집 삼형제가 20대 전후의 나이에 이역만리 만주로 망명하여 가족의 안위나 자신의 목숨마저 돌보지 않고 조국 광복을 위해 일생을 바치신 세분 선열들의 청사에 길이 남을 항일 투쟁 정신을 기림으로써 그 분들의 명예를 선양하고 후세들에게 올바른 국가관과 애국심을 고취시키고자 2000년 건립한 현충시설물로 주요 공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 박의연 (1880.9.20~1943.6.1)
- 1905 신돌석장군 의병진에 참가하여 의병운동 전개, 만주 하서구 남흥학교를 설립하여 동포들을 계몽하였으며 1919년 일경에 피검되어 사형장으로 가는 도중 탈출, 상해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1943년 순직.
* 박의열 (1889. 1. 21~1930. 11. 17)
- 1913 만주로 망명하여 부민단을 조직하고 검찰감으로 활동하였으며, 빈강현에서 동원학교 교장으로 군관 양성 및 민족 교육에 헌신하던 중 일인 밀정에 피살, 1930년 순국.
* 박의훈 (1895. 10.22~1983. 6. 19)
- 1913 만주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독립군결사대와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을 습격하는 등 독립운동전개, 광복 후 민족정기 선양 고양에 전력, 1990년 삼형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관리번호: 33-1-6
◆ 관리자: 애국지사함양박씨 문중대표
◆ 위치: 영덕군 창수면 인량2리 420
이 사적비는 영덕이 낳은 한집 삼형제가 20대 전후의 나이에 이역만리 만주로 망명하여 가족의 안위나 자신의 목숨마저 돌보지 않고 조국 광복을 위해 일생을 바치신 세분 선열들의 청사에 길이 남을 항일 투쟁 정신을 기림으로써 그 분들의 명예를 선양하고 후세들에게 올바른 국가관과 애국심을 고취시키고자 2000년 건립한 현충시설물로 주요 공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 박의연 (1880.9.20~1943.6.1)
- 1905 신돌석장군 의병진에 참가하여 의병운동 전개, 만주 하서구 남흥학교를 설립하여 동포들을 계몽하였으며 1919년 일경에 피검되어 사형장으로 가는 도중 탈출, 상해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1943년 순직.
* 박의열 (1889. 1. 21~1930. 11. 17)
- 1913 만주로 망명하여 부민단을 조직하고 검찰감으로 활동하였으며, 빈강현에서 동원학교 교장으로 군관 양성 및 민족 교육에 헌신하던 중 일인 밀정에 피살, 1930년 순국.
* 박의훈 (1895. 10.22~1983. 6. 19)
- 1913 만주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독립군결사대와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을 습격하는 등 독립운동전개, 광복 후 민족정기 선양 고양에 전력, 1990년 삼형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2리 420 애국지사 함양박공 3형제 사적비를 찾아왔다.
愛國志士 咸陽朴公 義熏·義烈·義然 事蹟碑
(애국지사 함양박공 의훈·의열·의연 사적비)
(애국지사 함양박공 의훈·의열·의연 사적비)
효우는 백행의 근본이요 충의는 만고의 명절이라 해사 박의연 하산 박의열 호산 박의훈 3형제는 우애가 돈독하여 함께 조국광복을 위해 사생취의한 분이다. 공들은 함양박씨이니 려말의 학자 문재공 치암 휘 충좌가 현조이시고 영해 입향조 원모재 휘 종산의 14세 손이요 울산공 소호 휘 신지의 9세손이다. 아버지는 휘 주병 통정돈녕부도정이고 어머니는 무안박씨이다. 의연공은 1880년 경진 9월 20일 영덕 창수에서 나셨다. 호는 해사이고 일명 건이요 자진이라는 이명도 가졌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신돌석 장군의 의병진에 참가하였고 신민회 영덕지구 대표로 뽑혀 활약하다가 1912년 32세 때 아우 의열과 이상용 김동삼 등과 솔권하여 만주 통화현으로 망명하였다. 그 곳의 이철영 이원일 여준 동지들과 합류하여 독립운동단체인 경학사 부민단을 발전시켰다. 1914년 하서강에 남흥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여 동포들을 계몽하고 민족사상을 고취시켰다. 동년 4월 유하현 삼원보에서 이상룡 김동삼 왕삼덕 곽급문 남정섭 등과 한민회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에 선임되어 군자금 모금에 힘썼다. 1915년 민족유일당 촉성회를 발기하여 남북만을 순회하다가 독립단의 한치응 박응서와 함께 일경의 밀정 유길선을 제거했다. 1919년
통의부 총관을 역임하였고 또 임시정부가 통합된 후에 국내 실태조사원의 명을 받아 귀국하여 그 의무를 수행하다가 경북 의성에서 피검되어 사형이 확정 형장으로 가는 도중 일인 통역자와 두 동생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다시 상해로 갔다. 1927년 3월에 신숙과 함께 독립촉성회를 결성하기 위하여 전만 대표자회의를 길림에서 소집 북만대표로 참석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광복을 두 해 앞둔 1943년 6월 11일에 파란 많은 생애를 마치니 향년 63세이다.
의열공은 1889년 기축 정월 21일에 나셨다. 호는 하산이고 세진은 이명이다. 1912년 24세때 백형 의연공을 따라 만주로 이주했다. 1913년 10월 통화현 하서강에서 허혁 등과 부민단을 조직하고 중앙검찰장에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1917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으며 1922년 통화현의 김만수 등과 자치회를 조직 일경과 싸우다가 유기동 김만수는 전사하였다. 공은 빈강현팔구에서 빈강정미소와 조길밀하에 농장을 경영하면서 동원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군관 양성 및 민족교육에 헌신하였다. 1930년 11월 17일 일인 밀정에게 피살 순국하시니 향년 41세이다.
의훈공은 1895년 을미 10월 22일에 나셨다. 호는 호산이고 명진은 이명이다. 공은 두 형의 망명 이듬해 만주 항인현에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통의부 제4중대원에 배속되어 활약했으며 1923년 화순계 옹호단에 입단하고 서로군정서 헌병대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 독립군 결사대원 50여명과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을 습격했으며 1931년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였다. 1934년 승덕가에서 중국인과 동풍태 정미소를 경영하면서 낙양군관학교 생도 모집차 지청천 오광선 등이 밀파한 황인 직금기대에게 독립자금을 지원하였다. 1945년에 광복군 국내 지대 선언부장 및 경리부장으로 활약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광복 동지들과 대종교에 관여하하면서 민족정기 고양에 진력하였다. 1983년 6월 19일 서거하시니 향년 88세이다. 의연공의 배위는 영양남씨인데 4남 2녀를 두었고 의열공의 배위는 영해신씨인데 1남 2녀를 두었고 의훈공의 배위는 김해김씨인데 1남 2녀를 두었다. 1990년에 정부로부터 3형제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한정된 돌에 공들의 혁혁한 사적을 소상히 밝히기는 어려웠다. 대강을 간추려 적고 명을 붙인다.
한 집 3형제가 조국광복에 몸을 던져 이역만리 만주 땅에서 안일이 없었네.
의열공은 1889년 기축 정월 21일에 나셨다. 호는 하산이고 세진은 이명이다. 1912년 24세때 백형 의연공을 따라 만주로 이주했다. 1913년 10월 통화현 하서강에서 허혁 등과 부민단을 조직하고 중앙검찰장에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1917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으며 1922년 통화현의 김만수 등과 자치회를 조직 일경과 싸우다가 유기동 김만수는 전사하였다. 공은 빈강현팔구에서 빈강정미소와 조길밀하에 농장을 경영하면서 동원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군관 양성 및 민족교육에 헌신하였다. 1930년 11월 17일 일인 밀정에게 피살 순국하시니 향년 41세이다.
의훈공은 1895년 을미 10월 22일에 나셨다. 호는 호산이고 명진은 이명이다. 공은 두 형의 망명 이듬해 만주 항인현에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통의부 제4중대원에 배속되어 활약했으며 1923년 화순계 옹호단에 입단하고 서로군정서 헌병대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 독립군 결사대원 50여명과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을 습격했으며 1931년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였다. 1934년 승덕가에서 중국인과 동풍태 정미소를 경영하면서 낙양군관학교 생도 모집차 지청천 오광선 등이 밀파한 황인 직금기대에게 독립자금을 지원하였다. 1945년에 광복군 국내 지대 선언부장 및 경리부장으로 활약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광복 동지들과 대종교에 관여하하면서 민족정기 고양에 진력하였다. 1983년 6월 19일 서거하시니 향년 88세이다. 의연공의 배위는 영양남씨인데 4남 2녀를 두었고 의열공의 배위는 영해신씨인데 1남 2녀를 두었고 의훈공의 배위는 김해김씨인데 1남 2녀를 두었다. 1990년에 정부로부터 3형제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한정된 돌에 공들의 혁혁한 사적을 소상히 밝히기는 어려웠다. 대강을 간추려 적고 명을 붙인다.
한 집 3형제가 조국광복에 몸을 던져 이역만리 만주 땅에서 안일이 없었네.
장하다 대한남아 명절을 세웠으니 그 소망 이룬 오늘 님은 돌아오소서
동해바다 춤추고 오곡이 익는 영해들 여기가 공들이 놀던 창수땅입니다
돌아오시어 우리의 정성을 받으시고 존영은 조국 강산과 함께 영원하소서
문학박사 진성 이동영 근찬, 광산 김영묵 근서
사적비건립추진위원회 고문 영덕군수 김우연, 위원장 영덕문화원장 신진용
1999년 10월 일
동해바다 춤추고 오곡이 익는 영해들 여기가 공들이 놀던 창수땅입니다
돌아오시어 우리의 정성을 받으시고 존영은 조국 강산과 함께 영원하소서
문학박사 진성 이동영 근찬, 광산 김영묵 근서
사적비건립추진위원회 고문 영덕군수 김우연, 위원장 영덕문화원장 신진용
1999년 10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