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도해단, 도해비, 도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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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대진리 278-1
탐방로그
영덕군 영해면 대진리 278-1에 위치한 김도현 선생 도해단, 도해비, 도해진을 찾았다. 원래 蹈海(도해)라는 말은 '진나라가 천하를 차지한다면 바다를 밟고 들어가 죽겠다'고 저항했던 중국 제나라 노중련의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영양 출신의 벽산 김도현 의병장은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특이한 사례를 남겼는데, 이른바 '蹈海(도해)' 걸어서 바다 속으로 들어가 순국했던 것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경북 영덕군 영해면 대진리 278-1 도해단을 찾아왔다.
도해단 안내문

관리번호 : 33-1-15
관리자 : 벽산김도현선생숭모회
국가보훈처지정 현충시설

여기 도해단은 한말 왜적이 우리 국권을 강탈하려 할제 창의항적(倡義抗敵)에 일생을 바친 벽산 김도현 선생이 도해 순국하신 유적이며 추모단이다.
벽산 김도현 선생은 1852년 7월 14일 경북 영양군 청기면 소청리에서 태어났으며 기개와 품기가 남달랐다.
1895년 왜적의 만행에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창의구국(倡義救國)에 사재(私財)로 병기 구입, 검산성을 쌓아 영양, 안동, 함창, 선성과 강원도 일대에서 결사항적하다 의병해산령으로 좌절하게 되었다.
고종황제 밀지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체포되어 6개월의 옥고를 겪었고 고향에서 영흥학교를 세워 후진을 양성하다, 부친상을 복결(服闋)하고 유서와 영결시(永訣詩)를 남기고 1914년 11월 7일 이곳 산수암(汕水巖)에서 도해순국(蹈海殉國) 하셨다.
1915년 3월 13일 영해 안동을 비롯한 전국 유림에서 도해비를 세웠으나 왜가 파괴수침(破壞水沈)하였다.
1950년 도해비 영립계(蹈海碑營立契)에서 모금, 1954년 11월에 도해비를 복구하게 되었다.
1971년 도해비 복구사업회가 현 도해단을 설단하고 벽산김도현선생숭모회가 매년 음력 7월 14일에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도해단(蹈海壇)
이 단(壇)은 1910년 8월 일본에 의해 나라가 강탈당함에 죽음으로 이를 징벌(懲罰)하고자 1914년 11월 7일 이곳에서 도해순국(蹈海殉國)한 항일 우국지사인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 선생의 애국충정을 기리고자 이 단을 세웠다. 그 후 박정희 대통령(朴正熙 大統領)께서 선생의 충정을 아시고 1971년 9월 3일 천추대의(千秋大義) 휘호(揮毫)를 내려 본 단을 중수(重修)하였다. 선생께서는 1852년 7월 14일 영양군 청기면 소청리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경전(經傳)과 사서(史書)를 탐독하며 세상의 동량(棟樑)이 되고자 하였으나, 나라의 운이 순조롭지 못함에 일신(一身)의 영달(榮達)을 버리고 구국(救國)의 가시밭길을 택하였으며 일본 왜적에 의한 민비시해 사건, 단발령 등으로 나라의 정체(正體)가 흔들리자 마침내 1895년 12월에 영양 청기에서 의병을 일으켜 안동과 예안, 평해를 오르내리며 맹활약을 하였고, 1896년 6월에 이르러서는 김하락(金河洛) 의진(義陳)의 영덕전투에 참여하여 동해안 일대에 있어서 한말 의병의 맥을 잇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고종황제의 의병해산 칙령(勅令)이 내리자 선생께서는 의병진을 해산하고 고향에 칩거(蟄居)하며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으나, 고종명(考終命)을 기다려 효(孝)를 다한 연후, 1914년 11월 7일 동짓날, 동해 건너 일본 왜적의 무리들을 막는 구국의 혼(魂)이 되고자 여기 대진리 산수암에서 장렬히 도해순국(蹈海殉國) 하였다.
2005년 4월 23일 벽산 김도현 선생 숭모회
絶命詩(절명시)
我生五百末/赤血滿腔腸/中間十九歲/鬚髮老秋霜/國亡淚末己/親沒痛更張/獨立故山碧/百計無一方/欲觀萬里海/七日當復陽/白白千丈水/足吾一身藏
오백년 말에 태어나 붉은피 온 간장에 엉키었는데
중년의 19년동안 머리카락만 늙어 가을서리 내린 듯 하네
나라가 망함에 눈물은 하염없으며 어버이 여의니 마음 또한 아파라
홀로 선 옛 산은 푸른데 온갖 계책 헤아려도 아무른 방책이 없네.
만리길에 바다를 보고자 하니 이례가 마침 동짓날이라
희디힌 저 천리길 물속 내 한 몸 넉넉히 간직할만 하여라.
汕水巖(산수암)
국권을 상실하게 되자 순국의 뜻을 품었고 부친의 장례를 마친 뒤 산수암에서 절명시를 짓고 '蹈海(도해)'를 결행하였다.
千秋大義(천추대의)
蹈海壇(도해단)
이 비는 원래 박정희 대통령께서 친필로 千秋大義(천추대의) 쓰신 것이였으나
어느 무지몽매한 학도들이 바다에 빠뜨린 것을 후손들이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遺書 與國內同胞 甲寅十一月初六日(유서 국내 동포들에게)
孤臣孤哀子金道鉉泣血仰告于我大東朝鮮國僉君子鳴呼通哉道鉉嘗讀漢書至吾先聖夫
子慾居朝鮮因東南海島有百倭種而未果掩卷太息曰噫夫子何不宣王道於吾東今而後知
夫子之洞視來世也一自華明永歷以來一線陽脈亶在吾東而今國亡而道亦亡寃乎通矣伏
願僉君子欽念我夫子遺意自玆以往腐心切齒家家磨劍人人嘗膽倂心協力齊聲疾號與倭
奴背城一戰勝則復我四千里 先王之國而興我四千年先聖之道敗則見 先王先聖於地
下無愧於天下萬世立人極於無窮也鳴呼道鉉奉八十五世之親情勢也行不得自專於世今
七月二十四日以天年謝世孤哀子年六十有三痛旣往之未就誓將來之可復今十一月七日
南至將死於東海而期於滅賊更願僉君子念之勉之恢光祖國
동해의 정기를 타고나 동해의 파도처럼 울며 살다가 동해에 몸을 던져 조국수호의 영원한 불사신이 되신 벽산 김도현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추앙하기 위하여 우리는 오늘 동해의 파도 치는 곳에 이 단을 쌓는다. 본관은 김녕 단종의 신하 충의공 휘 문기의 14세손 철종 3년 서기 1852년에 영양군 청기면 소청리 참봉 휘 성하의 아들로 태어나 천성이 총명 강직했고 31세 때 임오군란 43세 때 갑오년 동학혁명 그때마다 나라를 위하는 분개한 뜻을 참지 못하더니 이듬해 1895년에 왜적에게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가산을 팔아 군기를 마련하고 의병의 깃발을 들었다. 검산에다 진을 치고 청양에서 의병들을 불러 일으켜 안동 함창 선성과 강원도 일대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위로부터 조서가 내려 부득이 해산할 수 밖에 없었다. 10년이 지나 54세 때 을사 매국조약이 체결되자 토적소를 올이려다 못하고 도라와 위의 밀지를 받고 다시 일어나 의병을 일으켰으나 적의 손에 체포되어 대구감옥에서 고초를 당하고 58세에 석방되었다. 고향에 돌아와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기르고자 했으나 때는 이미 기울어져 경술년 국치를 당하니 59세 4년 뒤 어버이를 여의자 자손들에게 결심을 말하고
동포들에게 고하는 유서와 영결하는 시를 남긴 뒤에 망한 땅엔 묻힐 곳 없다 하며 바다 속으로 들어가니 19914년 63세 11월 7일 동짓날 이른 아침 몸은 영영 떠오르잖고 바다 위에 무지개만 서렸었다. 뒤에 영남 선비들이 선생을 사모하여 비를 세웠으나 일제가 그것을 깨트렸기로 우리가 오늘 다시 세운다. 아! 그 정신 그 이름 저 동해와 함께 길이 가소서.
1971년 9월 3일 후학 이은상 글 이관호 글씨
벽산선생 기념사업회에서 세우다
朝鮮 義士 碧山 金先生 蹈海津(조선 의사 벽산 김선생 도해진)
오호라 이곳은 조선의사 벽산 김선생의 도해진이다. 선생은 민족정기를 타고나신 거룩한 의사다. 그럼으로 선생의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혈액은 오직 민족의 안위와 국가의 휴척을 안고 회전할 뿐이었다. 선생의 휘는 도현이오 자는 명옥이며 호는 벽산이요 성은 김씨니 장릉절신 충의공 휘 문기의 14세손이다. 선생은 유구한 조국의 역사와 신성한 민족의 운명을 참아 적의 예안에 그대로 방치할 수 없기에 분연히 백인을 어루만지며 창의의 기발을
높이 들어 항일전투에 몸소 지휘 행진하신 그 빛난 정의의 발로가 우리 민족상에 길이 푸르렀다. 그러나 익주의 피폐를 공명의 외힘으로 돌려 잡을 수 없고 송조의 쇠망을 악비의 단손으로 붓들 수 없었다. 대세가 이미 기우려짐에 선생은 비분강개의 눈물을 뿌리시며 임원으로 잠간 발을 돌리섰다. 그리하여 광복의 대업이 영재 배양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신 선생은 또다시 육영사업에 정력을 기우리섰으나 때는 이미 늦어 경술년 국치를 당하였다. 나라를 잃은 의사의 갈길이 오직 수양의 고사리를 캐는 것 밖에 없건만 이것도 오히려 주나라의 우로에 젖고 자람이라 차라리 이 땅을 초연히 떠나려는 것이 선생의 결심이었다. 진나라의 가정을 몹시 싫어서 동해를 밟겠다는 노연의 제호는 다만 이론에 불가한 것이나 이것을 실천으로 옮긴이는 오직 우리 겨례의 벽산 선생이다. 그리고 순의의 탁절도 순간적 즉결은 오히려 쉬운 일이언만 노부의 여년을 기다려 종용히 효의병행의 양전을 갖춘 이가 바로 벽산 선생이다. 그 불타오르는 애국의 정열은 백일을 높이 뀌었고 그 깨끗한 사절의 방법은 창랑에 몸을 감추섰다. 서기 1914년 갑인 11월 7일 동짓날 이른 아침에 바다로 드러가신 후 영남 선비들이 선생을 추모하여 서기 1915년 을묘 3월 13일에 비를 세웠으나 포악한 일제가 그것을 뽑아 버리고 빈터만 남아있는 이 자리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오늘 다시
세운다. 아! 이렇게 선생의 숭고한 대의를 천추에 천양하고 아울러 천만민족의 충의를 새로이 환기하는 바이다.
동래 정휘발 근찬
진성 이광식 근서
광복 후 40년 갑자 11월 7일 립
碧山 先生 金道鉉 蹈海碑(벽산 선생 김도현 도해비)
遺詩(유시)
我生五百末(아생오백말) 나(我) 조선(朝鮮) 5백년 말기(末期)에 나서
赤血滿空腸(적혈만공장) 울분으로 붉은 피가 간장에 가득 엉켰어라
中間十九載(중간십구재) 중년의 19년간에 모발(毛髮)이
鬢髮老秋霜(빈발노추상) 이미 서릿발 같건만
國亡淚未己(국망누미기) 나라 망해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親沒心更傷(친몰심갱상) 어버이 여읜 슬픔 또한 겹쳤어라.
獨立古山碧(독립고산벽) 옛 푸른 산위에 홀로 서서
百計無一方(백계무일방) 백모로 생각해도 방략(方略)없으니
萬里欲觀海(만리욕관해) 만경창파 바다만 바라보고파
七日當復陽(칠일당부양) 초이레 동짓날 당도(當到)하였네
白白千丈水(백백천장수) 희고 맑은 천길 물속에
足吾一身藏(족오일신장) 이 한몸 넉넉히 감춤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