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렬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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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강원특별자치도 횡성군 우천면 문암리 336
탐방로그
한상렬 의사 추모비를 찾기 위해 강원 횡성군 우천면 문암리 336에 방문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강원 횡성군 우천면 문암리 336 한상렬 의사 추모비를 찾아왔다.
한상열 의사 추모비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16-1-19 / 소재지: 횡성군 우천면 문암리 336 / 건립자: 의사 건립비 추진위원회 / 관리자: 횡성군
1876년 4월 2일 강원도 횡성군 우천면 문암리에서 부친 한동수공과 모친 연일정씨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청소년 시절 선생은 일제의 침략에 의한 주권 상실과 1895년(고종 32년)의 을미의병을 보고 애국 사상과 항일의식을 품게 되었다. 1907년(광무 11년) 일제는 고종황제를 폐출하고 순종을 즉위시킨 후 정미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한국 군대를 해산시키자 원주 진위대 군사가 특무정교 민긍호를 중심으로 무기를 들고 일어나 왜병과 전투를 벌인 후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이때 선생은 32세의 청년으로 의병 200여명을 모아 지평, 홍천, 원주, 평창, 영월 등 지역에서 다수의 왜병을 죽이고 무기와 탄약을 노획하는 등 수백회에 걸쳐 큰 전과를 올렸다. 특히 1908년 2월에는 홍천에서 왜군부대와 크게 접전을 벌여 이를 격퇴시키니, 이에 분노한 일제는 4월 2일에 횡성의 일본수비대를 파견하여 홍천군 월운리 서북 후동에 은거하던 선생의 가족을 납치하여 선생에게 귀순하라고 회유와 협박을 다하였으나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부하를 거느리고 그들의 횡성 본거지를 습격하여 왜적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이후로 일제의 계획적인 대진압 작전으로 의병의 피해가 커지면서 정미의병은 점차로 해산하게 되었다. 경술국치 후 선생은 국내에서 항일투쟁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3·1운동 다음해인 1920년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투사들과 힘을 합하고 대한의용부 참모로 활약하였으며 1926년 2월에는 대한독립단 참모로 취임하여 항일 투쟁을 계속하던 중 그해 9월 19일 좌익단체의 흉탄에 맞아 돌아가시니 향년 51세였다.
선생의 시신은 동지들이 만주 길림성 훈춘현 산채구에 임시로 장사를 지내고, 아직도 독립된 고국에 돌아와 묻히지 못함을 절통히 여겨 그 추모의 정을 만분의 일이나마 위로하고자 선생의 고향마을에 추모비를 세웠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애국정신과 항일 투쟁의 공로를 표창하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였다.
문암리는 19세조 용자께서 하향정착하시여 충효부귀영화의 낙원으로 400여년 번영의 유적은 왜정 36년간 와가는 일병이 방화 재산은 몰수되고 석물파손된 묘소 25정만이 현존하니 통탄함이라 34세손 재진이 선조의 업적을 일부나마 건립하니 다행이라. 후손들은 선조의 애국충절의 유적을 탐구하여 보전을 바라며 본사럽의 조조하여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청주한씨 절도공파
韓相烈 義士 追慕碑(한상열 의사 추모비)
선생의 성은 한씨요 이름은 상렬 혹은 상열이요 자는 문극이니 본관이 청주로서 시태조 위위애공 휘 한의 32세손이요 절도사공 휘 만손의 18대 종손이다.
고종 13년 병자 1876년 4월 2일에 장원도 횡성군 우천면 문암리에서 부친 한동주 공과 모친 영일정씨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청소년 시절에 선생은 일제의 침략에 의한 국권상실과 고종 32년 1895년의 을미의병을 보고 애국사상과 항일의식을 품게 되었다. 광무 9년 1905년에 일제의 한국 병탄 야욕이 노골화되고 을사오조약을 늑결하자 이에 분개하여 민영환 조병세 등 자결하는 인사들이 속출하더니 다음 해에는 제2차 의병이 병오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때의 의병은 충청도의 민종식 선생과 전라도의 최익현 선생이 중심이 된 것이었다.
그러다가 다음 해인 광무 11년 1907년에 해아 밀사사건을 구실로 일제가 고종황제를 폐출하고 순종을 즉위시킨 후 정미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한국 군대를 해산시키게 되자 마침내 전국적인 의병이 다시 일어나게 되
었는데 이를 제3차 의병 또는 정미의병이라 부른다. 이전의 을미의병이나 병오의병이 대체로 노장층의 유림지도자가 중심이었는데 비하여 정미의병은 해산된 구한국군대가 중심이 된 것으로서 군사에 밝은 청년들이 앞장을 서는 의병이었기 때문에 왜병의 피해도 전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그런데 정미의병은 원주 진위군사가 특부정교 민긍호를 중심으로 무기를 들고 일어나 왜병과 전투를 벌인 후 전국으로 확대되게 되었다. 이때에 선생은 32세의 청년으로 이웃고을에서 의병이 일어남을 보고 자신도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몰아내기로 결심하고 의병 200여 명을 모아 저평, 홍천, 원주, 평창, 영월 등지에서 적을 공격하여 다수의 왜병을 죽이고 무기와 탄약등을 노획하였는데 왜적과의 교전이 수백 회이며 군사가 많을 때에는 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특히 무신 1908년 2월에는 홍천에서 왜군대군과 크게 접전을 벌여 이를 격퇴시키니 이에 분노한 일제는 4월 2일에 횡성의 수비대를 파견하여 홍천군 월운리 서북후동에 은거하던 선생의 가족을 납치하여 놓고 선생에게 귀순하라고 회유와 협박을 다하였으나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이달 20일에 부하를 거느리고 횡성읍을 습격하여 왜적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이후로 일제의 계획적인 대진압작전으로 의병의 피해가 커지면서 정미의병은 점차로 해산하게 되었다. 경술국치 후 선생은 국내에서 항일투쟁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3.1운동 다음해인 경신 1920년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투사들과 힘을 합하고 대한의용부참모로 활약하였으며 병인 1926년 2월에는 대한독립단 참모로 취임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던 중 그해 9월 19일에 민족진영의 분열과 그들의 주도권장악을 노린 좌익단체의 흉탄에 맞아 돌아가시니 향년 51세였다. 선생의 시신은 동지들이 만주 길림성 혼춘현 산채강에 권조하고 아직도 독립된 고국에 환장하지 못하여 그 혼백이 만리타국에 머물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라 하겠다. 선생의 배는 밀양박씨이며 계자 정희와 1녀를 두었고 정희는 재진 재화 재욱 3남과 3녀를 두었으며 재진은 영호 장호 경호 3남과 1녀를 두고 재화는 4녀를 두고 재욱은 아들 창호와 1녀를 두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애국정신과 항일투쟁의 공로를 표창하기 위하여 계묘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추서하였다. 이
제 선생의 장손 재진씨가 선생의 묘소를 고국으로 반장치 못함을 절통히 여기어 그 추모의 정을 만분의 일이나마 위로하고자 선생의 고향 마을에 이 비를 세우니 선생의 혼백은 이들에 의지하여 고국으로 돌아오기를 빌고 또 빈다.
단기 4325년 10월 10일
강원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박한설 근찬
대한민국 광복회 강원도 지부 후원
강원도 횡성군수 류재규 후원
청주한씨 절도공파 종친회 근립
의사추모비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한종희
1993년 6월 26일 근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