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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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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706 사은구장에 애국지사 이원영 목사 구 묘비를 추가로 옮겨놓았다고 하여 찾았다. 사은구장은 이원영 목사의 생가이며, 사은구장 내에는 구 묘비 말고도 이원영 목사의 연보가 적힌 비석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706 사은구장에 애국지사 이원영 목사 구 묘비
牧師 眞城 李公 源永 之墓(목사 진성 이공 원영 지묘)
牧師 眞城 李公 源永 之墓(목사 진성 이공 원영 지묘)
牧師 眞城 李公 源永 之墓(목사 진성 이공 원영 지묘)
眞城李公之墓(진성이공지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코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17절
공의 휘는 원영이요, 진성 이씨이니 시조 밀직사 휘 석이요, 14대조 문순공 휘 황이요, 6대조 형조참판 사은공 휘 귀운이요, 고 휘 관호요, 비 의성 김씨니 차자로 1886년 병술 7월 3일 도산원촌에서 출생하니 천자영오하고 효우지극하였다. 어려서는 한문을 배우고 장성하여서는 보문의숙에 수학하다 범사에 대의를 따라 행하고 특히 절의 두자로 일생의 좌우명을 삼았다. 을사조약에 비분강개하여 구국일념으로 기회를 기다리던 바 기미 3.1운동 때 예안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선도하다가 피체되어 경성감옥에서 1년 여의 옥고를 치르던 중 성경 진리를 깨닫고 단연 결신하게 되니 과연 하나님의 택하신 경륜은 신밀하기 이를 데 없도다. 형기를 마치고 고
향에 돌아와 향중에 선구가 되어 전도하고 교회를 세우는데 핍박도 많았지만 원세 원식 두 아우가 따라 믿게 되
어 장로가 되고 또 후사들도 성직에 참여하니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도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에 임직
되어 교회를 시무하던 중 의인의 앞길에 고난이 겹처 일제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시련에도 공은 시종불굴하였
고 ○○ 황민화 교육을 반대하여 자녀 취학을 거절하였으며 창씨도 단연 거절하니 그로 인하여 안동서에 수감
○되어 고문으로 사경에 이르면 방면하고 회생하면 다시 투옥되어 도내 각서로 전감이 되고 장구한 옥고를 겪
으며 결사 각오로 항일투쟁을 하셨다. 드디어 일제는 패망하고 해방으로 승리 출옥하시니 과시 공은 절의지사
○칭송되다. 해방을 맞아 건국사업에 헌신하시던 공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셨다. 경안고
등성경학교와 경안학교와 경안학원을 설립하여 교직 양성과 종교 교육에 큰 업적을 남기셨으며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장과 경안노회장에 역임하셨다. 서부교회 예배당을 신축하고 교회와 성경학교를 겸무하다가 격무로 인하여
병환으로 퇴임하니 명예원장 원로목사 공로목사로 추대되시다. 1958년 6월 21일 73세를 일기
로 소천되시니 경안노회장으로 예장하다. 따라서 국가유공자로 건국훈장이 되였다. 신후여음으로 사자 요한
과 여질 김세현 박만식 김수녕 권태갑 이택순 길춘배라. 공의 애국애족 순교순의에 몸 바치신 숭고한 생애를 기
○전수가 위하여 원호처의 후원과 자서 제질의 정성을 모아 정민으로 수갈하니 명왈
축암의 명정이 밝아젓고 인세를 굽어보고 절의를 지키시고
순직의 열풍이 불엇도다 하늘나라 바라보고 충성 다하였네
어 장로가 되고 또 후사들도 성직에 참여하니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도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에 임직
되어 교회를 시무하던 중 의인의 앞길에 고난이 겹처 일제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시련에도 공은 시종불굴하였
고 ○○ 황민화 교육을 반대하여 자녀 취학을 거절하였으며 창씨도 단연 거절하니 그로 인하여 안동서에 수감
○되어 고문으로 사경에 이르면 방면하고 회생하면 다시 투옥되어 도내 각서로 전감이 되고 장구한 옥고를 겪
으며 결사 각오로 항일투쟁을 하셨다. 드디어 일제는 패망하고 해방으로 승리 출옥하시니 과시 공은 절의지사
○칭송되다. 해방을 맞아 건국사업에 헌신하시던 공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셨다. 경안고
등성경학교와 경안학교와 경안학원을 설립하여 교직 양성과 종교 교육에 큰 업적을 남기셨으며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장과 경안노회장에 역임하셨다. 서부교회 예배당을 신축하고 교회와 성경학교를 겸무하다가 격무로 인하여
병환으로 퇴임하니 명예원장 원로목사 공로목사로 추대되시다. 1958년 6월 21일 73세를 일기
로 소천되시니 경안노회장으로 예장하다. 따라서 국가유공자로 건국훈장이 되였다. 신후여음으로 사자 요한
과 여질 김세현 박만식 김수녕 권태갑 이택순 길춘배라. 공의 애국애족 순교순의에 몸 바치신 숭고한 생애를 기
○전수가 위하여 원호처의 후원과 자서 제질의 정성을 모아 정민으로 수갈하니 명왈
축암의 명정이 밝아젓고 인세를 굽어보고 절의를 지키시고
순직의 열풍이 불엇도다 하늘나라 바라보고 충성 다하였네
위사를 배제하고 모범을 보였고 영광의 면류관 쓰고 천상에 높이 앉으시고
성도를 개도하여 공을 남기시다 형해는 지중에 기리 잠드시도다
1984년 10월 일
목사 임학수 근찬 종자 동창 근서
성도를 개도하여 공을 남기시다 형해는 지중에 기리 잠드시도다
1984년 10월 일
목사 임학수 근찬 종자 동창 근서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706 사은구장에 애국지사 이원영 목사 구 묘비를 추가로 옮겨놓았다고 하여 찾았다.
이육사문학관 뒷편의 복원생가는 모두 건물들로 바뀌어 있었다. 이육사 동상도 도로변으로 옮겨져있었다.
이원영목사의 생가인 사은구장(仕隱舊庄)
사은구장(仕隱舊庄) 이원영(李源永) 목사 생가 / 안동시 보존문화유산 49호
이 집은 조선 정조때 형조참판을 지낸 사은(仕隱) 이귀운(李龜雲, 1744~1823)의 집으로, 아호를 따라서 사은구장(仕隱舊庄)이라 부른다. 그는 퇴계선생의 8대손이자 원대처사 이구(李榘)의 현손이다. 문과로 벼슬길에 나아가 내직으로 삼사(三司)의 요직을 두루거쳐 대사간,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영해부사, 양산군수를 지내면서 출처의 올바름, 의리의 엄격함, 백성의 구휼, 지성스럽고 간절한 애군우국, 의리와 신의로써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았으며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지조를 지켰다. 또한 이름을 '벼슬길에서 숨긴다'는 뜻으로 아호를 '사은(仕隱)'이라 하였다.
이 집은 독립운동가 봉경(鳳卿) 이원영(李源永, 1886~1958) 목사의 생가로서 아버지는 사은 이귀운의 5대 주손인 이관호(李觀鎬)와 어머니(金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성장한 곳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여 15세에 사서오경을 통독하고, 20대엔 신식교육기관인 봉성측량강습소, 보문의숙에서 투철한 민족교육과 신교육을 받은 혁심유림이었다. 1919년 예안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피체되었고, 서대문 형무소 수감중에 이상동 장로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신하였다. 1930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신세교회(현 동부교회), 안기교회(현 안동서부교회) 등에서 목회를 사역하였다. 일제암흑기 창씨개명, 신사참배 거부로 목사직 시무사면을 당했으며 8.15광복까지 황민화정책거부로 4차례나 구금 되었다. 1945년 광복 후 출감하여 경안노회를 복구하여 안동서부교회를 재건하고, 경안고등성경학교(현 경안신학원)를 설립하여 교역자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54년에는 제39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추대되어 신사참배 취소성명을 발표하였다. 1958년 6월 21일 72세의 일기로 영면하니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고,1999년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2묘역에 이장되었다. 이원영 목사의 생애는 애국지사요 참된 교육자요 사랑의 목회자요 산 순교자로써 고난을 영광으로 승화시킨 아름다운 자취를 남긴 분이다.
이 집은 조선 정조때 형조참판을 지낸 사은(仕隱) 이귀운(李龜雲, 1744~1823)의 집으로, 아호를 따라서 사은구장(仕隱舊庄)이라 부른다. 그는 퇴계선생의 8대손이자 원대처사 이구(李榘)의 현손이다. 문과로 벼슬길에 나아가 내직으로 삼사(三司)의 요직을 두루거쳐 대사간,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영해부사, 양산군수를 지내면서 출처의 올바름, 의리의 엄격함, 백성의 구휼, 지성스럽고 간절한 애군우국, 의리와 신의로써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았으며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지조를 지켰다. 또한 이름을 '벼슬길에서 숨긴다'는 뜻으로 아호를 '사은(仕隱)'이라 하였다.
이 집은 독립운동가 봉경(鳳卿) 이원영(李源永, 1886~1958) 목사의 생가로서 아버지는 사은 이귀운의 5대 주손인 이관호(李觀鎬)와 어머니(金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성장한 곳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여 15세에 사서오경을 통독하고, 20대엔 신식교육기관인 봉성측량강습소, 보문의숙에서 투철한 민족교육과 신교육을 받은 혁심유림이었다. 1919년 예안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피체되었고, 서대문 형무소 수감중에 이상동 장로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신하였다. 1930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신세교회(현 동부교회), 안기교회(현 안동서부교회) 등에서 목회를 사역하였다. 일제암흑기 창씨개명, 신사참배 거부로 목사직 시무사면을 당했으며 8.15광복까지 황민화정책거부로 4차례나 구금 되었다. 1945년 광복 후 출감하여 경안노회를 복구하여 안동서부교회를 재건하고, 경안고등성경학교(현 경안신학원)를 설립하여 교역자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54년에는 제39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추대되어 신사참배 취소성명을 발표하였다. 1958년 6월 21일 72세의 일기로 영면하니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고,1999년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2묘역에 이장되었다. 이원영 목사의 생애는 애국지사요 참된 교육자요 사랑의 목회자요 산 순교자로써 고난을 영광으로 승화시킨 아름다운 자취를 남긴 분이다.
구 묘비 외에 집 앞에 생가터 표지석도 건립되어 있었다.
봉경 이원영 목사 생가
한국기독교사적 제36호 / 봉경 이원영 목사 생가 / 주후 2019.4.4.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이원영 목사 연보
1886.7.3 부 이관호와 모 김영의 둘째아들로 태어남
경주인 김기출 여사와 결혼 슬하에 1남 6녀를 둠
1886.7.3 부 이관호와 모 김영의 둘째아들로 태어남
경주인 김기출 여사와 결혼 슬하에 1남 6녀를 둠
1919.3.18 예안 3.1만세시위 주도혐의로 서대문 형무소 수감. 수감 중 예수교 입신
1921.10~1922.6 도산면에서 섬촌교회 설립 및 예배당 신축
1930.3.12 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
1930.12.18 경안노회에서 목사 안수
1932.12 신세교회와 안기교회 목사 시무
1933.12.19 경안노회(제24회) 노회장 피선
1938.12.13 일제 당국의 명령으로 목사직 시무 사면
1939.5.31~1945.8.16 일제 황민화정책 거부로 4차례 구속
1945.8.17 8.15 광복으로 출옥(경산경찰서)
1945.11.20 경안노회 제39회 복구회 노회장 제2차 피선
1947.6.29 안기교회를 안동서부교회로 개명, 복구해서 목사 시무
1953.11.24 경안노회 제54.55회 노회장으로 제5차 피선
1921.10~1922.6 도산면에서 섬촌교회 설립 및 예배당 신축
1930.3.12 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
1930.12.18 경안노회에서 목사 안수
1932.12 신세교회와 안기교회 목사 시무
1933.12.19 경안노회(제24회) 노회장 피선
1938.12.13 일제 당국의 명령으로 목사직 시무 사면
1939.5.31~1945.8.16 일제 황민화정책 거부로 4차례 구속
1945.8.17 8.15 광복으로 출옥(경산경찰서)
1945.11.20 경안노회 제39회 복구회 노회장 제2차 피선
1947.6.29 안기교회를 안동서부교회로 개명, 복구해서 목사 시무
1953.11.24 경안노회 제54.55회 노회장으로 제5차 피선
1954.4.23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9대 총회장 피선
1958.6.21 별세
1999.11.2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2묘역 제798호에 이장
1958.6.21 별세
1999.11.2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2묘역 제798호에 이장
昌庵(창암) / 仕隱舊庄(사은구장)
牧師 眞城 李公 源永 之墓(목사 진성 이공 원영 지묘)
묘비 이전 경위
이 비는 항일운동가 이원영 목사(1886.7.3~1958.6.21)의 묘비로써 안동군 풍산면 수곡동 산 56번지 산소에 세워졌던 것이다. 1999년 11월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2묘역으로 이장하면서 땅에 묻었던 것을 생가(안동시 문화유산 제49호 사은구장)에 기념비로 다시 옮겨 세웠다.
2015.8.15. 봉경 이원영 목사 기념사업회
이 비는 항일운동가 이원영 목사(1886.7.3~1958.6.21)의 묘비로써 안동군 풍산면 수곡동 산 56번지 산소에 세워졌던 것이다. 1999년 11월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2묘역으로 이장하면서 땅에 묻었던 것을 생가(안동시 문화유산 제49호 사은구장)에 기념비로 다시 옮겨 세웠다.
2015.8.15. 봉경 이원영 목사 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