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록 묘

4

주소
강원특별자치도 화천군 상서면 산양리 449-2
탐방로그
화천군 상서면 산양리 449-2 애국지사 박성록의 묘를 찾았다. 이 부근은 접경지역이라 위성 지도를 볼 수 없다. 다행히 도로변에서 묘소 안내판을 찾을 수 있었다. 또 산길부터는 위성이 보이지 않아 주소지까지 직접 이동했다.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다보면 큰 묘소가 바로 보인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김창의 이은규 선생을 비롯 김한식 김용구 한정종 지사와 함께 화천군 일원 주민에게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뜻을 설득 만세 시위군중을 규합하여 선봉에 나설 것을 결심하고 시기를 기다리던 중 1919년 3월 1일 거족적으로 전개된 민족운동인 독립만세를 계기로 화천군은 거사일을 동년 3월 23일로 내정하고 당일 화천면 하남면 상서면 주민 1000여명과 함께 읍내로 진입하다 직동 물레방아터에 이르러 한정종 지사가 이끄는 시위군중과 합세하여 그곳에서 1차로 독립선언문 낭독과 만세를 외치니 천지는 진동하고 산천초목이 화답하였고 지사께서는 다시 선봉에서 화천읍을 향하여 행진중 핑구고개에서 대기하던 왜병의 저지로 격렬한 공방 속에 총검을 헤치며 강행하려는 선생은 피체되었으니 교활한 헌병의 잔혹한 고문은 어찌 필설로 형언하리오 그러나 선생의 초지일관된 민족정신은 자주독립을 위한 평화적 시위의 정당성을 항변하며 침략과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대한남아의 장엄한 기개는 일편단심 구국의 혼을 불태움이니 일제의 경성복심법원에서 1919년 7월 7일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목불인견의 옥고로 득병 1938년 3월 16일 향년 47세를 일기로 한많은 조국의 광복을 못본채 타계하니 선생의 숭고한 얼은 후세에 면면히 계승되어 민족의 지표로 승화되리니 대한민국 정부는 그 공을 기려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으며 자손은 장자 윤서 차자 윤학이요 손은 관석이며 손녀는 명숙 명자 춘자 명화 명순 명애 명선 명란으로 후손이 번창하다.
서기 1992년 6월 일
광복회 강원도지부 사무국장 권희동 근찬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장 민경배 후원
광복회 강원도지부장 유연익 후원
강원도 화천군수 정호돈 건립
자 윤서 손 관석
화천군 상서면 산양리 449-2, 박성록의 묘를 찾아 가고 있다. 도로변에서 묘소 안내판을 찾을 수 있었다.
독립유공자 박성록 선생의 묘 600m 지점
해당 주소지에 도착하니 매우 큰 묘소가 바로 보였다.
애국지사 밀양박공 성록지묘
배 파평윤씨 부좌
애국지사 박성록 선생은 서기 1891년 10월 8일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신읍리에서 부친 박용주공과 모친 평강채씨 사이에 장자로 태어나니 본관은 밀양인이라 엄격한 가훈에 따라 성장함에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로 향리 어른들의 칭송과 총애를 받았으며 품성이 강직하고 지덕을 겸비한 청년시절에 이르러 국운의 쇠진을 노심초사 한탄하여 절치부심 찬분된 국권회복과 유린된 민족의 생존권을 회생키 위한 백성된 자의 가야할 길을 선택함에 신명을 바치는 호국충정이 으뜸이요 애친경장은 버금이라 대의의 심오한 웅지를 품고 오만방자하고 잔인무도한 왜적을 이 땅에서 몰아낼 대의를 도모함에 뜻을 같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