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동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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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창천리 684-2
탐방로그
백농 최규동 선생 고가에 들렀을 때 묘소의 위치를 설명듣고 왔지만 몇 번 물어 물어 찾아왔다. 개천을 건너서 광봉산 아래 미나리 밭이다. GPS 상으로 묘소 올라가는 입구의 주소는 성주군 가천면 창천리 684-2이다. 위로 올라가는 길에 입구를 나타내는 돌탑이 있지만, 수풀에 쌓여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위로 올라가는 길에 입구를 나타내는 돌탑이 있지만, 수풀에 쌓여있다.
백농선생 영천최공 신도비
예술원 회장 문학박사 박종화 짓고, 서울시 문화위원회 위원 김충현 쓰다.
나라를 사랑하는이 많다하나 백농 최규동선생처럼 겨레를 근심하고 사랑한분이 몇이나되는가? 선생은 약관시절에 나라의 운수가 글러짐을 보시고 이 겨레의 운명을 바로잡고 이 나라의 광복을 꾀하는 길은 오직 영특한 인재를 기르는데 있다 생각하시고 서리발같은 일인총칼속에 분연히 일어나 스스로 교편을 잡고 밥을 굶으시며 중동학교를 창립하시니 수천의 영재 비로소 이땅에 배출하였다. 선생은 한결같이 평생을 교육사업에 바치시는중 하늘운수가 다시 돌아와 대한민국정부가 서자 교육계의 원로로 중망에의하여 국립서울대학교 초대총장에 취임하시었으니 선생의 거룩한 인격과 온후한 덕망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불행히 이땅에 경인 6.25사변이 일어나자 선생은 괴로군에 납치되어 노령에 꾿꾿이 자유를 지켜 평양감옥에 옥사하시니 슬프도다. 선생은 대한민국 최고의 교육자로 나라에 순직하여 세상을 떠난것이다. 그해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고 국군은 평양을 탈환하여 압록강까지 치밀때 삼남 성악은 서랑 방성회와 같이 트럭으로 아버지의 종적을 찾으러 평양으로 달리어 결국 살아 계신 아버지를 대하지
못하고 유해의 아버지를 만났으니 효자들의 가슴이 어떠했으랴. 성악은 눈물을 머금고 아버지의 시체를 서울로 모시어 평생에 정이 든 중동학교 교장실에 빈소를 정하고 일헤만에 ..로 모시어 고향으로 발인하여 이곳 성주군 창천동 광봉안산 선영에 어머니 무덤과 함께 모시니 효자들의 한은 하늘에까지 사모쳤다. 선생은 임오 12월 30일 성주군 가천면 영천 최씨댁에 태어나시니 선생의 아버님의 휘짜는 영한이요, 어머님은 완산이씨라..서백가를 다통하니 신동이란 소문이 높았다. 성주 일판은 말할것없고 원근 각지에 명..했다. 소년 15세시에 의성김씨와 결혼하여 3남 6녀를 두셨고 16세때 서울.. 새로운 수학을 전공했고 평양으로 가시어 도산 안창호선생과 대성학교를 이룩하시..서울로 오시어 휘문, 중앙, 보성 각학교에 스승이 되시고 수학연구의 선구 정리사..한편 대한제국 융희3년 5월 중동학교를 창립하시었다. 선생의 향년은 69세이..문은 일찍 작고하고, 차남 성장은 의학박사로 광주김씨와 결혼하여 원곤, 춘곤, 정곤, 대곤,.원곤은 성문에게 출계하고 삼남 성악은 대한민국 외교관으로서 아들 유곤, 경곤을 두고..조촐하고 깨끗한 높은 덕업은 뒤를 이어 푸르고 창창하다.
단군기원 4291년 무술 3월 세우다.
GPS 상으로 묘소 올라가는 입구의 주소는 성주군 가천면 창천리 684-2이다.
영천최공 규동, 의성김씨 자혜 지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