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 505-11
- 탐방로그
-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 자작고개 동학 혁명군 전적지를 찾았다. 자작고개라는 이름은 치열한 전투에서 800여 명에 이르는 농민군이 흘린 피가 이 고갯마루를 자작자작 적실 만큼 흘러 고였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또 그 많은 동학 교도들의 시체가 묻혀 썩는데, 땅이 내려앉아 잦아진 고개라고 해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한편 당시 사람들이 자작자작 넘어가다 흔적 없이 사라졌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기도 한다. 자작고개는 동학군이 진을 쳤다고 해서 진등고개라고도 불린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농민군의 뜻을 기리고 넋을 위로하기 위해 자작고개 마루에 위령탑을 세웠다.
건립문
나라의 안팎이 어지럽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 노골화 되던 1894년(갑오) 구국제민의 기치를 높이 들고 동학농민군은 총궐기하여 혁명을 소리높이 외쳤다. 고부에서 전주로 다시 옥천에서 홍천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졌던 그 혁명의 이념은 안으로 봉건주의의 타파였고 밖으로 일본제국주의의 타도였다. 그리고 이것은 민중운동의 근대적 효시였으며 최초의 항일 민족운동으로서 위로는 삼국통일의 초석이 된 화랑의 애국정신과 아래로는 삼일운동의 정신적 맥락을 같이 하면서 이나라 근대사의 커다란 물굽이를 이루며 빛나는 각광을 받고 있다.
홍천에서는 그해 11월 접주 차기석과 친 일본군과 싸우며 홍천읍및 횡성방면의 관군에 맞서 내촌면 물걸리에서 먼저 혁명의 횃불을 올린후 두촌, 화촌, 동면과 홍천읍에서 격전을 벌렸고 또한 내면에서는 여러 차례의 공방전이 있었으니, 이 때 그 정의와 애국의 대열에 이 고장의 농민들은 혼연히 참여하여 귀한 신명을 바쳤다. 일본군의 침략적 출동으로 혁명군에게는 패색이 완연하던 때였으나 경기, 충청 그 외 여러 고을에서 모여든 동학군과 손을 잡고 홍천의 동학농민군은 승패에 구애됨이 없이 오직 정의를 위하여 싸웠던 것이다. 그러나 끝내는 수천 군중이 이곳 서석에 모여 항전하다가 30일(음력10월 23일) 그 힘이 다하여 빛나는 최후를 마쳤으니 그 수는 800에 이른다고 전해 오지만 대부분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참혹하게도 이 자리에 있던 구렁에 쓸어 묻었다고 한다.
이러한 착란의 역사를 반성하는 홍천 군민은 무명의 영령들 앞에 명복을 비는 정성을 모아 탑을 세우고 그 정의의 넋을 영원히 기리는 한편 이들의 애국혼을 오늘에 되새겨 우리들 마음의 등불을 삼고자한다.
나라의 안팎이 어지럽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 노골화 되던 1894년(갑오) 구국제민의 기치를 높이 들고 동학농민군은 총궐기하여 혁명을 소리높이 외쳤다. 고부에서 전주로 다시 옥천에서 홍천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졌던 그 혁명의 이념은 안으로 봉건주의의 타파였고 밖으로 일본제국주의의 타도였다. 그리고 이것은 민중운동의 근대적 효시였으며 최초의 항일 민족운동으로서 위로는 삼국통일의 초석이 된 화랑의 애국정신과 아래로는 삼일운동의 정신적 맥락을 같이 하면서 이나라 근대사의 커다란 물굽이를 이루며 빛나는 각광을 받고 있다.
홍천에서는 그해 11월 접주 차기석과 친 일본군과 싸우며 홍천읍및 횡성방면의 관군에 맞서 내촌면 물걸리에서 먼저 혁명의 횃불을 올린후 두촌, 화촌, 동면과 홍천읍에서 격전을 벌렸고 또한 내면에서는 여러 차례의 공방전이 있었으니, 이 때 그 정의와 애국의 대열에 이 고장의 농민들은 혼연히 참여하여 귀한 신명을 바쳤다. 일본군의 침략적 출동으로 혁명군에게는 패색이 완연하던 때였으나 경기, 충청 그 외 여러 고을에서 모여든 동학군과 손을 잡고 홍천의 동학농민군은 승패에 구애됨이 없이 오직 정의를 위하여 싸웠던 것이다. 그러나 끝내는 수천 군중이 이곳 서석에 모여 항전하다가 30일(음력10월 23일) 그 힘이 다하여 빛나는 최후를 마쳤으니 그 수는 800에 이른다고 전해 오지만 대부분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참혹하게도 이 자리에 있던 구렁에 쓸어 묻었다고 한다.
이러한 착란의 역사를 반성하는 홍천 군민은 무명의 영령들 앞에 명복을 비는 정성을 모아 탑을 세우고 그 정의의 넋을 영원히 기리는 한편 이들의 애국혼을 오늘에 되새겨 우리들 마음의 등불을 삼고자한다.
자작고개 동학군 최후 전적지
생각을 말자 그러나 잊어서는 안된다.
동학군 목숨 다바친 자작고개 역사를
누굴위해 들었던가 그 깃발 찢기던 그 날
저 하늘 저 구름도 눈물이 앞을 가려
자작고개 이 언덕을 비켜가지 않더냐
생각을 말자 그러나 잊어서는 안된다.
동학군 목숨 다 바친 자작고개 역사를
누굴 위해 들었던가 그 깃발 찢기던 그 날
피맺힌 가슴 맺힌 그 한을 어찌 풀까
자작고개 언덕에서 목숨 거둔 님들아
생각을 말자 그러나 잊어서는 안된다.
동학군 목숨 다바친 자작고개 역사를
누굴위해 들었던가 그 깃발 찢기던 그 날
저 하늘 저 구름도 눈물이 앞을 가려
자작고개 이 언덕을 비켜가지 않더냐
생각을 말자 그러나 잊어서는 안된다.
동학군 목숨 다 바친 자작고개 역사를
누굴 위해 들었던가 그 깃발 찢기던 그 날
피맺힌 가슴 맺힌 그 한을 어찌 풀까
자작고개 언덕에서 목숨 거둔 님들아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 자작고개 동학혁명군 전적지를 찾았다.
이곳은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싸웠던 전적지이다.
홍천 풍암리 동학혁명군 전적지
이곳은 조선 말기인 1894년 강원도의 동학혁명군이 관군과 싸우다 희생한 전적지이다. 1894년 1월 고부에서 시작하여 전라도를 중심으로 전개된 농민들의 반봉건 반침략 투쟁은 그해 9월부터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강원도에서는 9월 4일 강릉부를 점령한 뒤 11월까지 혁명군의 활동이 계속되었다.
홍천쪽의 싸움은 강릉, 양양, 원주, 횡성, 홍천의 5읍 접주로 불리던 차기석이 10월 13일 밤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동창을 들이친 뒤, 10월 21일 화촌면 장야촌에서 지평현감 맹영재가 이끄는 토벌대와 맞섰다. 30여명의 희생자를 남기고 서석으로 후퇴한 혁명군은 추격해온 관군과 이곳 진등을 중심으로 다시 싸움을 벌여 수백명의 희생자를 남겼다.
강원도 동학혁명군의 최대 격전지인 이곳 진등 자작고개에서 1976년 새마을 사업으로 길을 닦던 지역주민들이 숱한 유해를 발견하고, 1977년 12월 3일 주민들과 홍천군에서 뜻을 모아 동학혁명 위령탑을 세웠다.
이곳은 조선 말기인 1894년 강원도의 동학혁명군이 관군과 싸우다 희생한 전적지이다. 1894년 1월 고부에서 시작하여 전라도를 중심으로 전개된 농민들의 반봉건 반침략 투쟁은 그해 9월부터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강원도에서는 9월 4일 강릉부를 점령한 뒤 11월까지 혁명군의 활동이 계속되었다.
홍천쪽의 싸움은 강릉, 양양, 원주, 횡성, 홍천의 5읍 접주로 불리던 차기석이 10월 13일 밤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동창을 들이친 뒤, 10월 21일 화촌면 장야촌에서 지평현감 맹영재가 이끄는 토벌대와 맞섰다. 30여명의 희생자를 남기고 서석으로 후퇴한 혁명군은 추격해온 관군과 이곳 진등을 중심으로 다시 싸움을 벌여 수백명의 희생자를 남겼다.
강원도 동학혁명군의 최대 격전지인 이곳 진등 자작고개에서 1976년 새마을 사업으로 길을 닦던 지역주민들이 숱한 유해를 발견하고, 1977년 12월 3일 주민들과 홍천군에서 뜻을 모아 동학혁명 위령탑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