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인규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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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문경시 호계면 봉서리 산7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로 영강변 작산 남록 인좌지원하다. 슬하에 2남 1녀 중 장남에 종만 차남에 종구이고 여서는 청풍인 곽창모이다. 손은 장의 자로 경수 문수 원수이며 차의 자로 대석 대영이고 손서는 문화인 유택환 인천인 채희오 안동인 김덕수 개성인 고인환 평산인 신원혁 수성인 최승구 안동인 권순완이다. 증손은 동석 동기 동림 동녕 동철 세준 상혁 정환이다. 선생께서는 남다른 축복을 받으셔 후손을 잘 두셨기에 훌륭한 가보를 일문의 영광으로만 그치지 않으시고 현대인이 읽을 수 있는 책으로 만들어 세상에 펴고자 대석보가 서울서 천리나 먼 불초 이 사람에 역을 청하고 비문까지 부탁하니 효성에 감읍하여 이 비문을 지으니 많은 사람들이 우계문집을 읽어서 이 나라를 밝히는 등불이기를 빌면서 이 비가 마모되지 않고 영원하기를 소원하노라.
서기 2010년 경인 2월 일 진주 하위식 삼가 기록하고 초계변씨 문경 문중 삼가 세우노라.
국가보훈처
지락헌 뒷산에 있는 변인규 선생 묘소
처사 우계 초계변공 인규 지묘 배 유인 인천채씨 부좌 인좌
서기 1949년 5월 일
자 종만 종구
문하생 일동 근정
우계공 변선생지비
聞喜治山陽盤巖寅坐之原有阜皐如卽近故處士草溪卞公諱仁圭字通叔之壽藏也先生歿俊三十七年癸亥夏其次孫文洙君持其家乘及淸溪世稿訪余于京東寓而請其銘余雖不文嘗蒙先生之訪義不敢固辭謹按草溪之卞自唐時有尙書公諱源始來于東在麗朝諱庭實門下侍中封八溪君諡文烈公自始籍草溪寔鼻祖也諱南龍號靜奄恭愍朝門下侍郞李太祖御極授漢城判尹諱孝文世宗朝提學成均館大司成陰陽提調諱李欽號至樂成宗朝以鎭岑縣監辭歸晩卜山陽之盤巖我先祖懶齊先生至樂敍通家誼後雲仍世居諱玉新達
震河來先生之高曾祖皆隱德不仕考諱榮弼號杏軒持身以孝友淸儉訓子以仁義忠信慶州孫氏鎭德女幽閒貞淑婦德兼備高宗己卯一月二十七日生公于辰井里第氣後秀慧悟出倫見者莫不以遠大其明焉長而遊上舍溪權公及西山金先生間得聞仁義道德之說且涉百家子書仰而察天文之吉凶俯而驗地理之善惡以至於鳥獸鱗介金石草木無不硏究著萬物錄遭內外艱克遵古禮歎先代文字曲無徵手草溪卞氏文獻錄分以修儒賢孝行忠勳科宦焉運値百六倭寇侵略東學幷起國內洶洶見也事曰非斂跡山林以公之才敏學邃未能見用於也世而終老焉實慨嘆者也自方來學者甚衆各其才而敎之多有成就焉此孟子所謂三樂中一樂也且家素淸寒雖簞瓢屢空嘗晏此也此志於顔子之志而樂樂也本姓好山水歲乙酉與同志李孟全遊金剛著有記行及詩焉奧丁亥偶罹感崇而乃是歲六月二十五日考終于寢亨年六十九葬于盤岩遠近來弔者多有操文而痛哭焉配仁川蔡氏圭玄女懶齊諱壽之後於甲戌五月十日卒於墓合生二男一女長男鍾萬次男鍾九女淸風人郭昌模鍾萬子景洙文洙元洙鍾九子大碩大榮孫文化人柳澤桓仁川人蔡熙午安東人金德秀開城人高寅煥餘不盡錄系之以銘曰恭惟先生西山高弟早就賢師講道問禮芳弟心志相契承聞要訣忠信孝悌學文雖邃恨未用也是何故也板蕩之際今賢貞泯墓道用衛願言子孫永世勿替
西紀 一九八三年 五月 日
後學 慶熙大學校敎授 仁川 蔡仁植 謹撰
安東 權奇洛 謹書
門下生一同 謹竪

비문 중에 사람이름들이 실제 비석과 차이가 있다.
愛國志士 草溪卞公 仁圭 之墓(애국지사 초계변공 인규 지묘)
선생의 휘는 인규요 자는 통숙이며 우계는 호이시다. 본관은 초계이고 시조의 휘는 정실이며 관직은 고려조에 문하시중을 역임하셨고 익호는 문열이며 팔계군에 봉후되셨다. 누전하여 10대조 휘는 贇(윤,빈)이며 관직은 고려조에 문하평리를 역임하셨고 사문동 72현으로 사문동서원 표절실 정절반 제2위로 봉향되셨다. 16대조 휘는 남룡이요 자는 운경이시고 호는 정암이시며 관직은 조선 태종조에 한성판윤을 역임하셨다. 15대조 휘는 효문이요 자는 일민이며 관직은 세종 원년에 좌익원종공신이시며 중시에 합격하여 응교로 승진 성균관 대사성 예문 홍문관제학 음양제조를 역임하셨다. 14대조 휘는 이흠이요 호는 지락이시고 관직은 진잠현감을 역임하시고 중년에 문경군 호계면 봉양리 작산에 터를 잡고 암석을 깎아 지락헌 광원대 징파루를 지어 살으신 문경 입향조이시다. 증조 휘는 달진 하래이시다. 고의 휘는 영필이요 자는 몽여이고 호는 행헌이시며 도덕군자라 칭송을 받았고 자인 인규를 두무원에서 산장을 지어 주야로 인의충효로 훈육하셨다. 비는 경주손씨 진덕의 녀이시며 슬하에 2남 1녀 중 장자로 1879년에 문경군 산양면 진정리 102에서 탄생하시니 지혜총명과 재능이 탁월하시고 품성이 온후인자하시고 물욕을 탐하지 않으시고 후진육성에 전념하
셨다. 선생께서는 상사 하계 권상균 선생과 서산 김흥락 선생 문하에서 글을 배우자 학문이 일익일장하시어 시문경사에 통달하시니 교남의 태두였다. 인의충효가 몸에 배인 선생께서는 27세인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나라가 기울자 도창의대장 운강 이강년 선생의 좌종사도에서 자금조달과 의병 충원을 위하여 위협을 무릅쓰고 격문을 작성 부착하여 진충보국한 사실이 이강년 선생의 문집에서 입증되어 2005년 8월 15일 경축일에 국가로부터 훈장 국민포장을 받으신 애국지사이시다. 선생께서는 뻗쳐오는 왜구의 마수를 피하여 10여년이나 한국과 중국을 넘나들며 숨어 살았던 중원 땅을 시의 배경으로 삼았고 사서는 고대 요순과 하은에서 전국시대와 태당송원명청을 거쳐 우리나라까지 섭렵한 역사자료와 일생동안 견문한 것을 모두 활용하여 지은 시가 1400여수나 되니 시의 양도 많거니와 또 수천년의 시공을 뛰어넘었으니 역사상 타의 추종을 불허하셨다. 선생께서는 중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쫓기는 극한 상황에서도 여유와 낭만이 흐르는 시를 지어 독립운동을 하시던 대인의 기개를 엿보이게 하셨고 이는 독자로 하여금 가슴 뭉클케하는 점이다. 선생은 주옥같은 시집 3권을 포함하여 11여 권의 문집을 남겼으니 4권은 서이고 5권은 자문 기문 행록 시론 설문 상량문 비문 가장 기유록으로 이루어졌다. 6권은 선생 서거 시에 들어온 만사와 제문인데 어느 학자인들 만사와 제문만으로 책이 한 권 될만큼 많으랴. 7권 8권은 송나라 육전이 지은 비아편을 인용하여 동식물의 특성을 밝혀 우주만물의 이치를 설명하고 노자 공자 장자 문자 회남자 등의 사상과 결부시켜 학문적 이론을 철학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고 순자 관자 동자의 사상까지 논하였다. 9권 만물록은 조류와 화훼를 설명하고 10권 문견록은 사도난정의 죄명으로 참형을 당한 동학교주 최제우의 행적과 동학란의 진압과정을 듣고 본대로 기록한 책이다. 11권은 성현의 말씀과 이를 인용한 인생을 설명하였다. 선생께서는 10여 년을 각지를 떠돌며 숨어살면서 고향을 그리다가 환향하시어서는 많은 저술과 후진 양성을 위하여 우계학당을 건립하고 교육에 힘쓰시어 문하에 영양 남조익 안동 권병덕 평산 신형식 개성 고영진 영월 엄태두 진주 강성희 종질 종헌 등 원근의 거유 800여 명을 배출하시었으니 선생께서는 사상가이면서 독립운동가요 철학가이면서 시대가 낳은 시인이고 유학자이면서 대교육자이시다. 선생의 사상은 시문에 고스란히 전하니 영원하리라. 1947년 6월 25일 향년 69세로 서거하시니 배위 인천 채규현의 녀와 합분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