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세헌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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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진안리 120-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하와이에서는 이민단의 간부로서 동포들에게 항일구국정신을 심는데 정성을 다하면서 대한국민회와 흥사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17년에는 대한민국회 뉴욕지부장에 선임되어 그 운영자금을 담당하였고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한인자유대회에 참가하여 항일독립의지를 천명하여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키로 결의하고 지원자금을 갹출하면서 식료품수출입회사를 설립운영하여 많은 자금을 조성하였고 1921년에는 서재필 박사와 손을 잡고 센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평화회의에 한인활동을 지원하였으며 1922년에는 대한민족대표단의 일원으로 상해에 파견되어 시사책진회원으로 활약하고 1933년에는 조선의용대 후원회 시카고지회 대표로 선임되어 활동하였으며 1942년에는 미국 군사정보부와 접촉하여 한인의 대일 참전 문제를 협의하는 등 40여년간 미국 망명 생활에서 교포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면서 애국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각 애국단체의 기금 출자와 자금 조성 상해임정에 대한 자금조달 등 조국 광복을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여 노력하시다가 1945년 6월 14일 그렇게도 열망하던 조국의 광복을 눈 앞에 두고 이국땅 로스엔젤레스에서 눈을 감으셨다. 정부에서는 선생이 남기신 불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8월 15일 광복절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유해를 1996년 10월 2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소로 안장하였다. 선생의 결혼녀인 박기연 여사는 1916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상해로 탈출하여 중국상선으로 같은해 5월 8일에 센프란시스코에 도착 결혼하여 선생의 독립운동을 극력협조하였으며 2남 1녀를 두시니 장은 재우요 차는 재순이고 딸은 일미(앨마)니 모두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살고 있다. 이상으로 우리 고장의 자랑인 애국지사 천세헌 선생이 남기신 자취를 기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을 합니다.
이 한조각 돌이야 비 바람에 깍일지라도 선생이 남기신 나라사랑의 큰 뜻 영원히 살아 숨쉬며 오고 가는 길손들의 마음의 거울 되오리다
서기 2000년 6월 일
문경향교 전교 평산 신동철 짓고 애국지사 천세헌 선생 기념비 사업회 쓰고 세우다
경북 문경시 문경읍 진안리 128-1 문경새재 입구 애국지사 천세헌 선생 기념비
안내문 - 애국지사 천세헌 선생 기념비
애국지사 천세헌(千世憲 : 1881.5.7~1946.6.14) 선생은 임진왜란시 명나라 장수로 조병영양사겸총독장(調兵領糧使兼總督將)으로 군사 2만을 이끌고 임란에 참전하여 크게 공을 세우고 귀하하여 시,충장(諡忠壯) 봉.화산군(封花山君)이 하사된 천만리(千萬里)장군의 14세 孫으로 본관은 영양(潁陽) 자(字)는 종백(宗伯)이며, 문경시 산양면 부암리 397번지에서 태어나셨다. 1903년 사법부 재직중 뉴욕으로 망명하여 대한국민회 뉴욕지방총회장에 선임되어 국민회를 후원하고, 대한민족대표단의 일원으로 상하이에 파견되어 안창호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회원으로 활약하였으며,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시카고지방회 대표로 활동하면서 사십여년간의 미국 망명 생활에서 애국단체가입 등 조국의 독립운동을 하였다. 이에 정부로부터 1995년 8월 15일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고 유해는 대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선생의 애국정신을 고취시키고, 그 업적을 영원히 기리고자 문경시, 향토유림회, 영양천씨문경종친회에서 뜻을 모아 이곳 새재로변에 기념비를 건수하였다. - 문경시장
애국지사 천세헌 선생 기념비
한말의 일제 침략으로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을때 쓰러지는 나라를 바로세우려 애쓰시다가 나라가 일제에 강점당하자 해외로 망명하여 한 평생을 오직 조국광복을 위하여 싸우신 애국지사가 계셨으니 바로 우리 고장 출신의 천세헌 선생이시다. 선생의 휘는 세헌이요 자는 종백이며 관은 영양이니 선조 임진(1592년) 왜란때 명나라 동원군의 조병군양사겸총독장으로 우리나라에 파견되어 각처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왜적을 몰아내어 화산군에 봉함을 받은 휘 만리 시 충장공의 14세손으로 고의 휘는 병우요 비는 영성 엄씨 사진의 녀니 서기 1881년(신사) 5월 15일에 산양면 부암리에서 출생하시었다. 나면서부터 천자가 뛰어나고 웅대한 기상이 넘쳤으며 어려서는 가정에서 한학을 배웠고 16세에 청운의 뜻을 품고 서울에 올라가 외국어와 신지식을 배워 관계로 나아가 외부주사로 일하다가 한말국정의 혼란을 틈탄 구미열강의 침투와 일제의 병탐야욕을 보고 막을 방법이 없기에 선생은 1903년 약관 23세에 미주로의 망명길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