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식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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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민지리 174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천마산 솟은 아래 용암천 에워돌아 섬안의 형국을 이룬 이곳 민지리를 구국광정의 거의로써 인의를 밝힌 한 의려장의 고지로다. 휘 태식 자 열경 호 도암이니 성은 신이요 관은 평산이라 고려태사장절공 휘 숭겸은 시조요 선초 문희공 휘 개는 파조니 한천처사 휘 숙빈의 운잉인 명하의 맏으로 고종 갑자에 나시도다. 자품이 강경하고 지기가 헌앙하며 재서가 영민하여 기망이 원대하더니 광주 임인에 입조하여 통훈대부 중추원의관에 오르도다. 때마침 도이 창궐하고 국운이 기울자 분연히 결기하여 귀전하도다. 앞서 고종 을미에
는 왜의 밀정들을 농암장에서 포살하는 강개심을 보이더니 융희 정미에 의거의 횃불이 오르자 의병을 소모하여 호좌진을 도아 갈평전에서 승전하고 다시 충북 단양에서 함남안변에 이르는 팔도를 누벼 수천의 의려를 소모하여 대장으로 추대되도다. 보선봉 전세영 좌선봉 강창근 중군 유재칠 참모 엄해윤 영솔조안과 김운선생을 별포삼아 죽음으로 보국코자 맹활약하도다. 수의에 허위 이강년과 모의하고 강계에서 유인석께 군국의 정황을 상문하여 지략으로 토적하였으니 양주전에 적장 장삼랑을 생포하도다. 무신의 영평전에 총상을 입고 피체되니 내란강도율을 씌워 극형이 내렸으나 진민을 송덕하는 비가 선 사실로써 은고를 입어 영평민이 등소 거듭하여 무기에서 10년으로 감형되더니 적괴의 계소를 구실로 임자 섣달에 수여년의 영어에서 풀려나도다. 임술에 상해임정의 천거로 70여 동지를 모아 대한독립후원의용단을 조직하고 경북도단장이 되어 구국광복의 단충으로 군자금을 모으다가 사기현로되어 영옥에서 해포의 고초끝에 갑자에 출옥하였으나 망국의 통한과 옥고의 여독으로 광복전 임신에 향년 69세로 종고하니 성희 경희 이어 묘예번연하도다. 느꺼워 헤아리니 정미9월에 적의 반복으로 생가는 회신(灰燼)하고 빈터만 남아있고 유적은 핍박과 검속끝에 가사2결이 전할 뿐이로다. 광복의 단성을 우회한 창의가는 의려사를 수놓았고, 장토 찬미와 문물제도를 찬양한 답산가는 조국애를 일깨웠으니 참으로 구국독립과 계몽애족사상이 충일한 가조로다. 본도는 이를 문화보재로 지정하고 나라는 그 애국애정을 기려 건국훈장 국
민장을 추서하도다. 이에 미쁘신 님의 뜻을 한줄 시로 기리나니 앙갚자고 지른 불길 의로움튼 씨가되어 봄따라 이 터위에 경초로 돋아나니 질풍이 몰아친 뒤에야 외려 굳게 빛나도다.
경북 문경시 가은읍 민지리 186에 있는 생가마을 입구 의병대장 도암 신선생 유허비
義兵大將 島菴 申先生 遺墟碑(의병대장 도암 신선생 유허비)
천마산 솟은 아래 용암천 에워돌아 섬안의 형국을 이룬 이곳 민지리를 구국광정의 거의로써 인의를 밝힌 한 의려장의 고지로다. 휘 태식 자 열경 호 도암이니 성은 신이요 관은 평산이라 고려태사장절공 휘 숭겸은 시조요 선초 문희공 휘 개는 파조니 한천처사 휘 숙빈의 운잉인 명하의 맏으로 고종 갑자에 나시도다. 자품이 강경하고 지기가 헌앙하며 재서가 영민하여 기망이 원대하더니 광주 임인에 입조하여 통훈대부 중추원의관에 오르도다. 때마침 도이 창궐하고 국운이 기울자 분연히 결기하여 귀전하도다. 앞서 고종 을미에는 왜의 밀정들을 농암장에서 포살하는 강개심을 보이더니 융희 정미에 의거의 횃불이 오르자 의병을 소모하여 호좌진을 도아 갈평전에서 승전하고 다시 충북 단양에서 함남안변에 이르는 팔도를 누벼 수천의 의려를 소모하여 대장으로 추대되도다. 보선봉 전세영 좌선봉 강창근 중군 유재칠 참모 엄해윤 영솔조안과 김운선생을 별포삼아 죽음으로 보국코자 맹활약하도다. 수의에 허위 이강년과 모의하고 강계에서 유인석께 군국의 정황을 상문하여 지략으로 토적하였으니 양주전에 적장 장삼랑을 생포하도다. 무신의 영평전에 총상을 입고 피체되니 내란강도율을 씌워 극형이 내렸으나 진민을 송덕하는 비가 선 사실로써 은고를 입어 영평민이 등소 거듭하여 무기에서 10년으로 감형되더니 적괴의 계소를 구실로 임자 섣달에 수여년의 영어에서 풀려나도다. 임술에 상해임정의 천거로 70여 동지를 모아 대한독립후원의용단을 조직하고 경북도단장이 되어 구국광복의 단충으로 군자금을 모으다가 사기현로되어 영옥에서 해포의 고초끝에 갑자에 출옥하였으나 망국의 통한과 옥고의 여독으로 광복전 임신에 향년 69세로 종고하니 성희 경희 이어 묘예번연하도다. 느꺼워 헤아리니 정미9월에 적의 반복으로 생가는 회신(灰燼)하고 빈터만 남아있고 유적은 핍박과 검속끝에 가사2결이 전할 뿐이로다. 광복의 단성을 우회한 창의가는 의려사를 수놓았고, 장토 찬미와 문물제도를 찬양한 답산가는 조국애를 일깨웠으니 참으로 구국독립과 계몽애족사상이 충일한 가조로다. 본도는 이를 문화보재로 지정하고 나라는 그 애국애정을 기려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도다. 이에 미쁘신 님의 뜻을 한줄 시로 기리나니 앙갚자고 지른 불길 의로움튼 씨가되어 봄따라 이 터위에 경초로 돋아나니 질풍이 몰아친 뒤에야 외려 굳게 빛나도다.
경북 문경시 가은읍 민지리 186에 있는 생가마을 입구 의병대장 도암 신선생 유허비

義兵大將 島菴 申先生 遺墟碑(의병대장 도암 신선생 유허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