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구미시 무을면 무등리 70-1
- 탐방로그
- 남상순 기념비, 송덕비, 공적비가 같은 위치에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진혼
조국을 위해 산화한
피우지 못한 꽃봉우리여
암흑의 장막을 걷으시고
서광의 하늘문을 여셨네
태극기는
중앙청에 다시 휘날리고
비둘기는 남산에
평화로이 날으니
아- 그날
감격의 눈물은 흐르고
장부도 흐느꼈으니
장하도다
호국의 영령이여
애국지사의 혼이여
한 많은 역사의 사연을 잊으시고
고이 잠드소서
편안히 쉬옵소서
대한민국 광복동지회
조국을 위해 산화한
피우지 못한 꽃봉우리여
암흑의 장막을 걷으시고
서광의 하늘문을 여셨네
태극기는
중앙청에 다시 휘날리고
비둘기는 남산에
평화로이 날으니
아- 그날
감격의 눈물은 흐르고
장부도 흐느꼈으니
장하도다
호국의 영령이여
애국지사의 혼이여
한 많은 역사의 사연을 잊으시고
고이 잠드소서
편안히 쉬옵소서
대한민국 광복동지회
黑駒志士 紀念碑 建立推進委員會(흑구지사 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
기념비와 송덕비가 있던 곳에서 왼쪽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 40m 가량 들어간 곳에 위치한 마을 입구에 남상순 공적비가 있다.
愛國鬪士 宜寧南公 諱 相淳 功績碑(애국투사 의령남공 휘 상순 공적비)
청운에 품은 뜻이 나라 잃은 서러움에 어린 가슴을 갈기찟어 조국 광복 대열에 살신선도 노도와 같이 의지를 다지니 조국강토와 맥을 같이하고 민족혼 속에 잠 설치는 애족애국 단심의 큰 자취 남겼다.
의령 남공 흑구 휘 상순 애국투사께서는 충열의 고장인 선산군 무을면 무등동 72번지에서 려말 명신이며 포은 야은 선생과 더불어 경학의 대가이신 익 문안 대 사천백 휘 을진공의 19대손 휘 경희공의 4남으로 태어나 이런시절 사부의 가르침 이어 청운에 뜻을 갈아 단신 현해탄을 넘으니 16세 이역고행 풍상은 살을 애이는 아픔이었으리 고학하는 배움의 열망이 나라 잃은 서러움에 앞이 가려 민족해방과 조국광복의 선도의지를 굳혔으니 동지들과 뜻을 모아 재일본 대판(오사카) 한국인 고학생 민족주의 단체 충성회를 결성하고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나라 사랑하는 마음 깊이 새겼네 나라 잃은 아픈 상처 몸부림 컸네
현해 넘은 이역 단신 배움길에서 고학소년 조국찾는 단심에 절규
거룩하다 충성모임 뿌리 내려라 신명바쳐 깊이 심은 광복의 씨앗
님은 가고 남은 자취 모아 챙기니 나라위해 바친 공이 높고도 크다
공께서는 불굴의 의지로 살신우국 투쟁에 외길을 달리시어 배움에 길 마져 막히고 급기야 1942년 12월 28일 일본제국주의 쇠사슬에 감기여 한 맺힌 고초를 넘기며 3년의 선고형을 받았으니 오직 민족혼만이 공에 아픔과 외로움을 달랬으리라. 조국광복과 더불어 석방되어 한때 철기 이범석 장군이 이끄는 민족청년단에 몸을 담았으나 소년 혁명가는 광복의 환희만을 간직하고 안거의 여생을 보내며 청주한씨와 슬하에 1남 2녀를 맥 지우고 조국통일의 염원을 남긴 채 파란만장한 세대를 마치시다.
의령 남공 흑구 휘 상순 애국투사께서는 충열의 고장인 선산군 무을면 무등동 72번지에서 려말 명신이며 포은 야은 선생과 더불어 경학의 대가이신 익 문안 대 사천백 휘 을진공의 19대손 휘 경희공의 4남으로 태어나 이런시절 사부의 가르침 이어 청운에 뜻을 갈아 단신 현해탄을 넘으니 16세 이역고행 풍상은 살을 애이는 아픔이었으리 고학하는 배움의 열망이 나라 잃은 서러움에 앞이 가려 민족해방과 조국광복의 선도의지를 굳혔으니 동지들과 뜻을 모아 재일본 대판(오사카) 한국인 고학생 민족주의 단체 충성회를 결성하고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나라 사랑하는 마음 깊이 새겼네 나라 잃은 아픈 상처 몸부림 컸네
현해 넘은 이역 단신 배움길에서 고학소년 조국찾는 단심에 절규
거룩하다 충성모임 뿌리 내려라 신명바쳐 깊이 심은 광복의 씨앗
님은 가고 남은 자취 모아 챙기니 나라위해 바친 공이 높고도 크다
공께서는 불굴의 의지로 살신우국 투쟁에 외길을 달리시어 배움에 길 마져 막히고 급기야 1942년 12월 28일 일본제국주의 쇠사슬에 감기여 한 맺힌 고초를 넘기며 3년의 선고형을 받았으니 오직 민족혼만이 공에 아픔과 외로움을 달랬으리라. 조국광복과 더불어 석방되어 한때 철기 이범석 장군이 이끄는 민족청년단에 몸을 담았으나 소년 혁명가는 광복의 환희만을 간직하고 안거의 여생을 보내며 청주한씨와 슬하에 1남 2녀를 맥 지우고 조국통일의 염원을 남긴 채 파란만장한 세대를 마치시다.
공의 고귀한 희생과 애국지성에 향내 유림이 흠모의 정을 모아 나라사랑한 애국투사의 자취를 영세에 깊이 새긴다.
서기 1985년 1월 일
전주인 벽곡 최종윤 선산군수 근찬
인동인 장병훈 근서
유도회 선산군지부
서기 1985년 1월 일
전주인 벽곡 최종윤 선산군수 근찬
인동인 장병훈 근서
유도회 선산군지부
경북 구미시 무을면 무등리 70-1 독립지사 남상순 기념비, 송덕비, 공적비를 찾아왔다.
第一海史公園 / 忠孝 (제1해사공원 / 충효)
海史 宜寧南公 相龍 頌德碑(해사 의령남공 상룡 송덕비)
海史 宜寧南公 相龍 頌德碑(해사 의령남공 상룡 송덕비)
해사 의령남공 상룡 선생은 이조를 개국한 태조가 입사할 것을 친서로 여러번 불렀으나 불사이군의 고절을 지켜 백이 숙제의 넋을 흠모하여 저 유명한 남선굴에 숨어 고려 망국에 머리를 풀고 통곡하며 단식 순절하신 충절신이요. 경학에 정통하신 참지 문하부사 사천백 문안공 휘을진의 2대손이며 상신 6명과 대제학 6명 문과 급제 140명이 배출된 동방 화족으로서 충렬의 가통을 이은 의농 경희공과 용궁김씨 사이에 5형제 2남으로 서기 1918년 6월 30일 무을면 가정리에서 태어낫다. 고매한 인격을 지녔던 춘사 상욱공은 백씨요. 3제 여산 상명공은 숭조 목족심이 돈후하며 의령
남씨 사천백공파 중앙회장이요. 4제 흑구 상순공은 항일독립지사요. 5제 초암 상길공은 일본 남북상사대표로 활약 중이며 모다 최고 학부를 이수한 백중 계숙 제씨가 언충행독한 인격과 성경신의 가훈을 지켜 오늘에 이르렀다. 선생은 반세기 전 구국의 웅지를 품고 도일하여 민족차별의 냉대와 파란만장의 역경 속에서 오직 성실 정직한 대인관과 불철주야 면학을 생활 철학으로 삼아 사업을 경영하여 흉중에 불타는 조국 향토애를 발휘하고 유재 선용의 고귀한 정신으로 친족들을 구휼하며 장학사업을 펴는 한편 선생은 20대에 긍한 선조들의 묘역과 치산 정화에 진심갈력하므로 숭조사상을 수범하였으며 또한 향토애의 화신인 선생은 본면 농업협동조합에 주유소를 설치 기증하고 거금을 농협에 장기 예치하여 수 빈휼민에 활용토록 성력을 경주하였고 본면 국민학교와 중학교에 시청각교재를 설치하여 교육의 과학화를 도모하고 또다시 거액의 장학재단을 설립 헌납하여 육영사업에 이바지하였으며 경찰지서 사택을 신축 기증하므로서 보국안민에 성력을 기우렸다. 이로써 선생의 후덕한 향토애가 지선에 이르니 이농집도하든 이향민이 발길을 돌려 안주하게 되고 조선 누대의 향인에게 애향심을 고취시키므로서 후진들에게 애국심을 승화시켜 충효의 감화는 일파만파로 진선진미의 의표가 되니 뭇새들도 노래하고 춤춘다는 우리 고장 무을에 권선징악하고 상부상조하는 향풍을 진작시키고 온후순박한 인심의 복지 낙토 건설에 공헌하신 선생의 공덕을 기려 영세불망하는 면민들은 존경과 사의를 표하여 선생의 출생지인 이곳에 비를 세우고 공적을 새
겨 영원불멸의 사표로 삼노라
서기 1987년 3월 일
한의학박사 은율 송효정 근찬
평산 신태인 근서
무을 면민 수립
서기 1987년 3월 일
한의학박사 은율 송효정 근찬
평산 신태인 근서
무을 면민 수립
나라 잃은 어둠 속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젊음을 불태운 애국지사가 이 고장에 속출한 가운데 남상순님이 있다. 님의 호는 흑구요 본관은 의령이니 고려말에 문학과 충절로 이름높은 익 문안대 사천백 휘 을진공의 20대손이다. 부 경희공과 모 용궁전씨 사이에 4남으로 태어나니 형에 상역 상용 상명 아우에 상길이 있다. 1926년 2월 19일 선산군 무을면 무등동에서 나서 무을보통학교를 마치고 15세에 어린 나이에 큰 뜻을 품고 홀로 현해탄을 건너 일본대학부설 대판중학교에서 고학을 하던 중 경상남도 의령군 출신인 전영수를 비롯한 학우 아홉사람이 모여 1941년 6월부터 이듬해 12월 사이에 서른 차례 넘는 밀회를 가짐에 민족단체인 충성회를 만들고 당기와 당표징을 정하여 나라사랑의 젊은 정열을 불살랐다. 그러나 이 독립운동이 발각되어 님과 동지들은 1942년 12월에 왜경에 붙잡히니 님의 나이 16세라 모진 조사를 받고 1944년 1월 27일 대판지방재판소에서 징역 3년의 선고를 받게 되었다. 적국 감옥에서 한 많은 청춘을 오매면서도 광복을 고대하는 마음은 굳어가기만 했다. 드디어 8.15해방을 맞아 오매 잊지 못하던 조국의 품안에 안기며 나라 찾은 기쁨 속에서 나라 발전에 헌신하기를 다짐했다.
철기 이범석 장군이 이끌던 민족청년단에 몸을 담고 국가재건의 기반조성에 온갖 정열을 쏟았다. 조국의 밝은 내일을 바라보며 전력을 바쳤다. 그러나 하늘은 님에게 넉넉한 시간을 주지않아 그 님 원하던 조국통일을 보지 못한 채 1978년 3월 3일 52세를 일기로 이승을 떴으니 애닯은 일이기도 하다. 님은 청주한씨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에 승우 딸에 정우 선우가 있다. 1980년 8월14일 대통령표창장 제4987호를 받으니 이는 숭고한 애국정신과 나라위한 평생의 발자취를 기리고 빛내는 표상이라 하겠다. 본회는 우리 고장이 낳은 애국지사 흑구님의 뜻과 행적을 돌에 새겨 나라 사랑의 거울로 삼고 전한다. 명하여 노래부르노니
왕대밭에 왕대나고 명산대전 용나르니 절개 높은 조상 모신 선산 땅의 남씨가문 상순님이 충성회로 나라 광복 꾀한일들 이 고을의 자랑이요 이 겨레의 거울이라 애국애족 님의 공덕 돌에 새겨 세우나니 오랠수록 본보기요 어둘수록 빛나리라.
1988년 4월 10일 글 선주문학회, 글씨 철학박사 동강 조수호, 수립 선산 군민
철기 이범석 장군이 이끌던 민족청년단에 몸을 담고 국가재건의 기반조성에 온갖 정열을 쏟았다. 조국의 밝은 내일을 바라보며 전력을 바쳤다. 그러나 하늘은 님에게 넉넉한 시간을 주지않아 그 님 원하던 조국통일을 보지 못한 채 1978년 3월 3일 52세를 일기로 이승을 떴으니 애닯은 일이기도 하다. 님은 청주한씨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에 승우 딸에 정우 선우가 있다. 1980년 8월14일 대통령표창장 제4987호를 받으니 이는 숭고한 애국정신과 나라위한 평생의 발자취를 기리고 빛내는 표상이라 하겠다. 본회는 우리 고장이 낳은 애국지사 흑구님의 뜻과 행적을 돌에 새겨 나라 사랑의 거울로 삼고 전한다. 명하여 노래부르노니
왕대밭에 왕대나고 명산대전 용나르니 절개 높은 조상 모신 선산 땅의 남씨가문 상순님이 충성회로 나라 광복 꾀한일들 이 고을의 자랑이요 이 겨레의 거울이라 애국애족 님의 공덕 돌에 새겨 세우나니 오랠수록 본보기요 어둘수록 빛나리라.
1988년 4월 10일 글 선주문학회, 글씨 철학박사 동강 조수호, 수립 선산 군민
獨立志士 南相淳 紀念碑(독립지사 남상순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