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68
- 탐방로그
- 경상북도 경주시에 위치한 독립유공자 최완 선생의 생가이다. 형인 최준 선생의 생가는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독립유공자 최완(崔浣) 선생 생가
최완(1889~1927년) 선생은 이곳 교촌에서 태어났으며, 독립운동가 최준(崔俊) 선생의 아우이다. 1909년에 안희제.이원식.윤병호.서상일 등 80여명의 애국지사와 함께 신민회 계열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국권회복에 뜻을 두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10년 8월에 일제의 강제 조약에 의해 국권이 상실되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그 해 4월 13일에 임시정부 의정원 회의에서 재무부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조사원과 의정원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그 후 일제의 간계와 음모로 체포.압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결국 오랜 망명생활 끝에 얻은 지병이 악화되어 38세의 젊은 나이에 운명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제 애국애족의 일념으로 일생을 항일운동에 헌신한 선생의 숭고한 정신과 실천적 삶을 여기 기록하고, 길이 후세에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최완(1889~1927년) 선생은 이곳 교촌에서 태어났으며, 독립운동가 최준(崔俊) 선생의 아우이다. 1909년에 안희제.이원식.윤병호.서상일 등 80여명의 애국지사와 함께 신민회 계열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국권회복에 뜻을 두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10년 8월에 일제의 강제 조약에 의해 국권이 상실되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그 해 4월 13일에 임시정부 의정원 회의에서 재무부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조사원과 의정원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그 후 일제의 간계와 음모로 체포.압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결국 오랜 망명생활 끝에 얻은 지병이 악화되어 38세의 젊은 나이에 운명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제 애국애족의 일념으로 일생을 항일운동에 헌신한 선생의 숭고한 정신과 실천적 삶을 여기 기록하고, 길이 후세에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경주시 교동 경주 최부자 독립유공자 최준, 최완 선생 생가를 찾았다.
경주 최부자댁은 조국 광복을 위한 군자금을 제공한 독립유공자의 집안이자, 대한광복회 박상진 의사의 처가이기도 하다.
동생이신 최완 선생의 생가는 최준 선생 생가 바로 옆에 있다.
경주시 교동 68번지. 최준 선생의 동생이며 역시 독립유공자이신 최완 선생의 생가이다.
독립유공자 최완(崔浣) 선생 생가
최완(1889~1927년) 선생은 이곳 교촌에서 태어났으며, 독립운동가 최준(崔俊) 선생의 아우이다. 1909년에 안희제, 이원식, 윤병호, 서상일 등 80여 명의 애국지사와 함께 신민회 계열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국권회복에 뜻을 두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10년 8월에 일제의 강제 조약에 의해 국권이 상실되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그 해 4월 13일에 임시정부 의정원 회의에서 재무부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조사원과 의정원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그 후 일제의 간계와 음모로 체포, 압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결국 오랜 망명생활 끝에 얻은 지병이 악화되어 38세의 젊은 나이에 운명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제 애국애족의 일념으로 일생을 항일운동에 헌신한 선생의 숭고한 정신과 실천적 삶을 여기 기록하고, 길이 후세에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최완(1889~1927년) 선생은 이곳 교촌에서 태어났으며, 독립운동가 최준(崔俊) 선생의 아우이다. 1909년에 안희제, 이원식, 윤병호, 서상일 등 80여 명의 애국지사와 함께 신민회 계열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국권회복에 뜻을 두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10년 8월에 일제의 강제 조약에 의해 국권이 상실되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그 해 4월 13일에 임시정부 의정원 회의에서 재무부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조사원과 의정원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그 후 일제의 간계와 음모로 체포, 압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결국 오랜 망명생활 끝에 얻은 지병이 악화되어 38세의 젊은 나이에 운명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제 애국애족의 일념으로 일생을 항일운동에 헌신한 선생의 숭고한 정신과 실천적 삶을 여기 기록하고, 길이 후세에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